■ 코딜리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악몽, 잔인성에 스민 시대의 악
2차 세계대전 막바지, 곤충학자인 아버지를 따라 북쪽 황무지를 떠돌아다니던 여덟 살 소녀 일레인은 여느 여자 아이들과는 달랐다. 다른 아이들이 원피스를 입고 얌전히 교회를 다닐 때, 일레인은 오빠와 함께 벌레를 잡고 병정놀이를 하며 ‘학교’와 ‘여자 친구들’이란 것을 동경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레인 가족이 토론토에 정착하게 되었을 때, 이 ‘다름’은 곧 코딜리어를 필두로 한 또래 아이들의 ‘배척’과 ‘따돌림’으로 이어진다. 코딜리어의 독설과 비난에 시달리는 일레인은 급기야 자신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는지, 걸음걸이가 어떤지, 표정은 어떤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등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 신경을 쓰게 된다. 스스로 ‘어딘가 잘못된 아이’가 아닌지 고민하게 된 어느 날, 일레인은 자신의 발의 살갗을 벗겨 내기 시작한다. 피가 나올 때까지 계속 벗겨 낸 후, 양말을 신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통을 참으며 걷는다. ‘고통’을 통해 자신이 ‘존재함’을 인식하는 것이다. 일레인이 코딜리어로부터 벗어나는 또 하나의 방법은 ‘기절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기절한 날, 일레인은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느낀다. ‘기절’은 떠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장소, 보기 싫지만 곁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다. 이윽고 일레인은 자신이 원할 때면 기절할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하기에 이른다.
“나는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떠나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장소들을 벗
어나는 방법이 있다. 기절은 샛길로 내려서는 것과 같다.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시간으로부터 다른 시간 안으로, 내려서는 것. 깨어나 보면 그 후의 시간이다. 시간은 나 없이 흘러가 버린 것이다.”(1권 305쪽)
어느 겨울밤, 코딜리어가 일레인의 모자를 낚아채 다리 아래로 던져 버린다. 모자를 가지러 간 일레인은 반쯤 얼어붙은 강에 빠져 버리고 코딜리어를 비롯한 친구들은 일레인을 남겨 두고 도망친다. 추위에 떨며 점차 밀려드는 졸음을 견디던 일레인은 한 여인의 실루엣이 공중을 걸어 자신에게 다가오는 것을 본다. 일레인은 그 환영이 ‘성모 마리아’라고 생각한다. 일레인에게 있어 성모 마리아는 권위적이고 보수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기독교(당시 캐나다 중산층 집안의 풍경)와는 상반되는, 여성 주체적 존재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일레인은 드디어 코딜리어에게서 도망칠 수 있게 된다.
여성들 사이의 갈등과 반목을 부각시킨다는 것을 이유로 『고양이 눈』이 반여성주의적 작품이라고 비판하는 비평가들도 있다. 그렇다면 남성들 간의 갈등을 그려 내면 반남성주의가 되는가? 애트우드는 반문한다. 실제로 애트우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에 유보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1981년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페미니즘은 너무나 광범위한 단어라서 사실 아무런 의미를 담지 못하며, 때로는 특정 작가들을 편협하게 규정하고 무시해 버리는 수단이 된다고 말했다. 여성을 그려 내고 그들의 문제에 관심을 둔다는 면에서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부를 수 있지만, 여성들의 도덕적 우월성이나 그들만의 연대를 주장하는 페미니즘은 거부한다는 것. 『고양이 눈』에서 애트우드가 주목하는 것은 아이들 세계에 스며든 억압적인 관습과 편협한 교육, 타 종교에 대한 차별적 시설과 성차별이다. 토론토에 정착한 일레인 가족이 공공연히 차별과 무시를 당하는 이유는 이들의 생활 방식이 1940-1950년대의 편협하고 가부장적인 토론토 중산층의 행동 양식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소녀들은 이턴 카탈로그를 오려 붙이고 종이 인형을 갖고 노는 자신들의 사소한 놀이조차 당대 사회의 관습과 규범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스미스 부인은 여자아이들로부터 일레인이 괴롭힘을 받는 것이 이교도 가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며 방관한다.
■ 1940~1990년대 캐나다 풍경의 완벽한 재현, 그리고 여성 예술가의 자화상
애트우드가 캐나다 문학의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녀가 국제적 명성을 얻게 된 최초의 캐나다 작가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애트우드가 캐나다 문학의 특성, 캐나다적 경험의 본질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는 『고양이 눈』에서도 잘 드러난다. 작품 속에서 일레인의 성장은 캐나다의 정치, 문화적 성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린 일레인의 눈에 비친 캐나다는 보수적인 기독교 집안, 권위적인 가장, 카디건을 걸치고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것이 미덕인 부인들, 채찍을 들고 다니던 엄격한 여선생, 제국주의적 역사 수업, 남학생용과 여학생용으로 구분된 출입문 등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일레인이 한 여자로서, 예술가로서 성장해 갈수록 캐나다 사회의 모습도 점차 변모해 간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부터 1980년대 후반부에 이르는 동안 캐나다는 대영 제국의 변방적 국가에서 보다 확고한 정체성을 가진 국가로, 영국계와 프랑스계 이민자들의 국가에서 다민족, 다문화적 국가로, 그리고 성 역할 구분이 확실한 가부장적 사회에서 좀 더 평등한 사회로 바뀌었다. 또한 여성의 평등권을 법적으로 명시했으며 특정 인종과 국민을 배제하던 차별적 이민 정책도 보다 포괄적이고 공평한 이민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일레인의 성장과 더불어, 현재 시점으로 진행되는 그녀의 전시회는 이 작품에 또 다른 깊이와 재미를 더해 주는 요소다. 여성 예술가로서 일레인의 삶은 마거릿 애트우드가 가지고 있는 현대 미술에 대한 풍부한 지식이 뒷받침되어 작품에 깊이를 더한다. 뿐만 아니라 애트우드는 일레인이 ‘여성’ 예술가라는 점에 무게를 싣는다. 일레인은 캐나다에서는 가히 최초로 페미니즘 작가들 중 한 명으로 인정받는다.
“동정녀 마리아 작품과 스미스 부인 작품은 전부 전시회에 포함되었다. 나는 스미스 부인이 지나치게 많다고 생각했지만 조디는 모두 전시하기 원했다. “이것은 반(反) 관능적 여자 모습이에요.” 조디는 말한다. “왜 항상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하는가? 그와 달리 늙어 가는 여자의 신체가 동정적으로 그려진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녀는 보다 과장된 언어를 동원하여 이런 글을 카탈로그에 싣는다.“(2권 269쪽)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일레인 자신이 ‘의식적으로’ 페미니즘적 작품을 만들거나 여성의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레인은 어린 시절 자신을 이단아 취급하며 상처를 준 스미스 부인, 모욕과 독설을 서슴지 않던 코딜리어,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자를 임신시키고 떠나가거나 다른 여자를 만나는 남자들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일레인은 단지 오늘날의 자신을 있게 한 과거의 기억들을 그려 낼 뿐이다. 이 때, 자신의 정체성을 탐색하려는 한 여성 예술가의 시도는 곧 페미니즘적 행위로 인식되어 버리는 것이다.
■ 집으로 가는 길, 집을 찾기 위한 하나의 여정
일레인과 코딜리어는 반목하고 배반하지만, 궁극적으로 보자면 서로를 반영해 주면서 각자를 완성시켜 주는 반쪽이 되는 상보적 관계다. 일레인은 코딜리어 초상화에 「반쪽 얼굴」이라는 제목을 붙임으로써 코딜리어가 자신의 반쪽이었다는 깨달음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한다. 「반쪽 얼굴」과 반대로 「고양이 눈」이라는 자화상에서는 자신의 현재 얼굴 반쪽만 등장한다. 화면의 나머지는 자신이 볼 수 없는 후면의 거울에 비추인 젊었을 때의 머리 뒤쪽과 유년 시절 친구 세 명으로 채워진다. 실제로 반쪽 얼굴만 그린 자화상에서 나머지 반쪽을 완성시켜 주는 것은 여자 친구들인 것이다. 그래서 일레인은 토론토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코딜리어와의 재회를 꿈꾼다. 자신에게 비추어진 코딜리어의 모습을 들려주고, 코딜리어 편에서 바라본 자신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파편화된 자아를 통합시켜 완성해 주기 위해서다.
일레인의 초기 작품들 역시 현재 시제로 복원된 과거와 같다. 기억 속에 존재하지만, 잃어버린 시간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이라서 그것들은 모든 맥락에서 절연되어 있으며, 일레인은 그 사물들과 관련된 자신의 영상을 전혀 떠올릴 수 없다. 낡은 여행용 트렁크에서 우연히 고양이 눈 구슬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고 나서 그 사물들이 불안하고 조바심에 가득 찼던 유년 시절의 물건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회고전에서 과거 작품들을 통해 자신의 삶 전체를 돌아본 후에 그것이 망각 속에 소실된 사물과 삶들을 되살리려는 시도였음을 깨닫는다.
어떤 의미에서 일레인의 삶은 집을 찾기 위한 하나의 여정이라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집으로 가는 그녀의 여정은 예술적 행로와 궤를 같이한다. 숲속을 돌아다니며 뿌리 없이 살 때, 읽기 첵에 나온 말뚝 울타리와 하얀 커튼이 있는 집은 일레인에게 집에 대한 하나의 이상을 제시해 준다. 그러나 토론토에서 마주친 새로운 집은 책 속의 집과 거리가 멀다. 실망스러운 토론토에서의 삶을 뒤로하고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집이다. 그러나 내가 돌아갈 수 있는 곳은 아무것도 아닌 곳이다.”라고 말하며 밴쿠버를 새로운 집으로 받아들이고 이제까지 집이었던 토론토를 “아무것도 아닌 곳(nowhere)”으로 규정짓는다. 그렇다고 해서 토론토와 완전히 단절된 새로운 삶을 꾸려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레인을 계속 따라다니는 코딜리어의 목소리는 일레인을 무의 어두움 속으로 계속 밀어 넣는다.
일레인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잊어버린 것과 잃어버린 것을 회복하고 과거와 화해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밴쿠버로 가는 길의 풍경이 유년기 유랑적 삶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새로운 삶을 개척하기 위한 일레인의 미래로의 여정은 과거에 대한 회고, 지난 길을 되돌아가 보는 것과 맞닿아 있는 것이다. 회고전에서 자신의 그림들, 자신이 구축한 시간들을 다시 둘러보는 일레인은 복수를 위해 그렸던 스미스 부인의 눈, “독선적이고 돼지 같고 철사 테 안에서 잘난 체하는 눈”에서 불확실성과 우울과 과도한 의무에 짓눌린 불행한 이의 눈을 발견한다. 스미스 부인 역시 작은 곳에서 도시로 온, 과거의 일레인과 같은 난민이었던 것이다. 밴쿠버에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어린아이들과 같은 두 할머니의 천진난만한 우정을 보면서 자신이 궁극적으로 찾고 있었던 것이 갈등과 괴로움 없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였음을 알아차린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나지 않을 미래, 영원히 상실된 코딜리어와의 조우를 애도한다. 더 나이 들고 더 강해지고, 돌아갈 진짜 집이 있는 자신과 달리 코딜리어는 아직 과거의 시간에 갇혀 차가운 협곡에서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홉 살 코딜리어의 수치심, 아픔, 외로움, 두려움을 이해한 일레인은 과거의 친구에게 평안을 기원하고 화해의 손길을 내민다. “괜찮아. 이제 집에 가도 된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