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머니가 마녀가 아닌지 의심하는 소녀
몇십 년을 함께했으나 여전히 서로가 못마땅한 사랑스러운 커플
어느 완벽한 여름밤, 상실과 추억을 나누는 다정한 늙은 자매
「숲속의 늙은 아이들」은 「도덕적 혼란」에 등장했던 넬과 티그 커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 두 사람은 실제로 결혼은 하지 않고 파트너 관계로 평생을 살아온 마거릿 애트우드와 작가 그레임 깁슨을 떠올리게 한다. 넬과 티그는 여전히 함께 평온하게 살아가고 있으나, 노화가 진행됨에 따라 시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점차 아이들처럼 천진난만하게 삶 곳곳에 도사린 위험을 간과하게 된다. (「응급처치」) 이 소설집에는 마거릿 애트우드 자신을 대변하는‘넬’이 1인칭 화자로 등장하는 작품이 여럿인데, ‘넬’은 주로 옛 시대의 기억을 간직한, 그러나 곧 스러져갈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2차 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이웃으로 우정을 나누며 살아온 두 남자 이야기(「그을린 두 남자」), 마찬가지로 전쟁에서 활약한 티그의 아버지와 그의 과거를 그린 (「쾌활한 준장」) 등이다. 2019년, 애트우드의 파트너인 그레임 깁슨이 세상을 떠난 이후 발표된 작품들은 그에 대한 그리움과 상실 (「과부들」(「나무 상자」), 그리고 여동생과 보내는 숲속에서의 나날을 통해 이를 극복하는 과정 (「숲속의 늙은 아이들」)을 담고 있다.
‘넬과 티그’를 등장시킨 애트우드의 자전적 이야기 외에도 이 소설집에는 SF, 대체 역사물, 판타지, 우화 등에 해당할 넓은 스펙트럼의 작품들이 담겨 있다. 별안간 지구에 나타난 우주인이 지구인들에게 페미니즘적 우화를 설파하는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 이집트의 여성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알렉산드리아의 히파티아의 목소리와 그 죽음의 과정을 담은 「조개껍데기사(死)」, 어느 날 인간 여자가 돼버린 달팽이의 처절한 괴로움을 그린 「윤회 또는 영혼의 여행」, 마치 『시녀 이야기』의 스핀오프인 듯한 대체 역사 이야기를 담은 「아수라장」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다양한 유형의 여성들의 삶을 다룬 단편들이 있다. 어머니가 마녀가 아닌지 의심하는 소녀와 그 속마음을 훤히 꿰뚫는 어머니의 이야기인 「나의 사악한 어머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악한 행동을 해 온 친구를 평생 버리지 못하는 한 여성 이야기 「역겨운 이」, 그리고 함께 나이 들어가며 페미니스트로서 겪어 온 역경을 함께 나누는 노년 여성 학자들의 이야기인 「비행-심포지엄」 등의 작품들이 ‘스토리텔러’로서 애트우드의 진면목을 드러낸다.
■ 가슴 서늘한 현실과 기이한 상상력으로 자아낸 환상을
교차하며 쌓아 올린 거장의 이야기
마음이 무너져 내리네, 넬은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마음이 무너져 내려.” 같은 말은 하지 않는다.
대신 “과자 좀 있어?”라고 말한다. _「숲속의 늙은 아이들」
애트우드는 장편소설로 유명한 작가이지만, 「도덕적 혼란」과 「숲속의 늙은 아이들」 같은 단편소설과 시, 에세이 등 각종 장르를 아우르며 글쓰기를 해 온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나 연작 소설집인 「도덕적 혼란」과 「숲속의 늙은 아이들」은 애트우드 자신의 삶이 강하게 반영돼 있어서 눈길을 끄는데, 전자에는 유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는 기간이, 후자엔 그레임 깁슨과 함께한 장년 시절부터 노년기까지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깁슨이 세상을 떠난 후에 발표된 마지막 세 작품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과 애도, 그리고 인생의 황혼과 죽음을 관망하는 조용한 성찰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작품 전반의 톤을 지배하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지적이고 날카로우면서도 유머러스한 애트우드의 목소리다. 이 책에는 평생 페미니즘과 여성의 삶에 천착해 온 작가답게 소녀, 중년 여성, 어머니, 독신 여성 등 다양한 삶의 조건하에 놓인 여성들의 모습이 담겨 있는데, 이들의 때로는 다정하고, 때로는 사납거나 사악한 모습들은 더 없이 입체적이고 생생하다. 또한 SF와 우화의 틀을 빌려 서늘한 상상력을 펼치며 인간 종(種)의 이분법적 성 역할이 지닌 우스꽝스러운 면모를 풍자한 「참을성 없는 그리젤다」, 산 작가인 애트우드가 죽은 작가인 조지 오웰을 인터뷰 하는 형식을 취한 「망자 인터뷰」 같은 몇몇 전복적인 소설들은 폭소를 자아낸다.
작품의 원제 ‘Old Babes in the wood’에서 ‘Babes in the wood’는 우리말로 하면 ‘물가에 내놓은 아이’와 흡사한 뜻으로, 이 책에서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삶에 대해 천진난만한 태도를 지녔던 ‘넬과 티그’ 커플의 이야기로 읽힐 수도 있고, 확장하면 더욱 팍팍해져 가는 여성의 현실적 삶 속에서도 여전히 이상주의적 태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애트우트의 이 신간 소설집은 이제 만년의 나이에 이른 소설의 대가가 우리에게 보내는 위트 있는 연대의 이야기이자 다양한 삶의 찬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