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입적 감시와 권의주의적 사회 통제 그리고 인간의 상실
이 책은 먼저 팬데믹이라는 공중보건의 비상사태에서 공공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조치로 내려진 락다운 정책의 문제와 그 속에 감춰진 의도를 짚는 것으로 시작한다. 행정명령에 의한 비상사태는 사회적 논의나 민주적 절차 없이 너무 쉽게 선포되었다. 그것이 이미 선포되고 나면 국가권력은 초법적으로 개인의 삶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권위주의적 대책들을 서슴없이 시행한다. 감염자를 강제격리하고 휴교와 휴업을 명령하며 출입과 이동을 제한한다. 디지털 기술은 공공 안전을 위한 획기적인 발명품처럼 선전되지만 그 기술로 수집된 정보는 때로 차별과 낙인찍기에 악용되고, 사회 구성원들을 통제하는 데 이용된다. 지문, 홍채, 안면, 보행 같은 생체 특성이 신분 확인과 동선 감시, 개인 건강 정보를 통한 질병 전파 위험 감시, 휴대전화 위치 추적 등에 적극 이용되고,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는 거대한 ‘디지털 파놉티콘’에 갇히게 되지만 아무도 그것에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우리는 기꺼이 동조했다. 간혹 문제를 제기하는 소수는 공공의 안전을 해치는 위험인물로 매도된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공민권이 아무렇지 않게 침해되고, 이웃과 친구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하게 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고, 이에 문제를 제기하거나 저항하면 돌아오는 것은 차별과 배제다. 심지어 때로는 의도가 전혀 없는 행위마저도 매도당해 사회적 비난을 초래한다. 이와 같은 일은 이름은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뿐 아니라 팬데믹 시기에 한국을 포함해 전 세계에서 벌어졌다. 저자는 팬데믹 기간 동안 행해진 침입적 감시와 권위주의적 사회 통제 정책에 의문을 제기하고 적극적으로 성찰해야 조지 오웰이 소설 『1984』에서 예견한 디스토피아를 막을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난 몇 년 사이 잃어버린 것은 단순히 자유만이 아니다. 더 비극적이고 중요한 문제는 진정한 인간관계를 훼손당했다는 것이다.
“대중 감시 기술의 등장으로 우리는 이제 일종의 세계적인 디지털 파놉티콘에서 살고 있다. 여기서는 시민 각자가 간수이자 동시에 수감자이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지배자의 질책을 두려워하고, 서로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모든 이웃이 잠재적 밀고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잠재적 밀고자는 주머니 안에 스마트폰 카메라를 가지고 다닌다. 이것은 디지털 파놉티콘이 단순히 은유가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사람들이 실제로 감시하고 있다.”(70쪽)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다
저자는 코로나19가 기술의 시대, 과학이 승리한 시대에 등장한 첫 번째 팬데믹으로 정의한다. 팬데믹과 관련한 많은 설명과 대응조치는 과학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사람들은 전문가, 과학이라는 이름 앞에 겸손해지는 경향이 있다. 테크노크라트technocrat들은 그런 대중심리를 이용한다. 그들은 합리주의를 추종하는 엘리트 행정가들로, 과학기술의 힘을 숭상한다. 공공복리를 위해 과학적 방법론과 데이터를 근거로 정책을 결정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과학은 어느 순간 누군가의 입을 틀어막는 수단이 된 듯하다. 상대의 반론 제기를 몰상식으로 몰아세운다. 하지만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일 확률이 높다. 과학주의는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이 과학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이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모습을 띤다면 그것은 과학이 아니라 신념이고 종교일 뿐이다. 팬데믹 기간 동안 많은 정책이 과학과 전문가에 근거에 행해졌고, 공포에 눌린 사람들은 말없이 따랐다. 케리아티처럼 이에 저항한 사람들은 ‘비과학적’이라거나 불순분자 취급을 받으며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다. 케리아티는 이런 과학에 대한 맹신의 위험성을 경고함과 동시에 많은 기술관료와 과학자들이 거대 자본에 포획된 사실도 폭로한다.
“과학의 특징적인 요소는 정당한 불확실성이다. 여기서 지적 겸손이 발로한다.
과학주의의 특징적인 요소는 부당한 확실성이다. 이것은 지적 오만으로 귀결된다.” (98쪽)
“20세기의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는 모두 ‘과학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자신의 순환논리에 의해 허위를 입증할 수 없었다. 과학주의는 합리적 주장을 통해 정립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선전을 위한 세 가지 도구에 의존했다. 잔인한 폭력, 비판자에 대한 모욕 그리고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약속. 모든 전체주의 체제가 이것과 똑같은 도구를 사용했다.” (99쪽)
‘당신은 백신 반대자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
팬데믹 기간 동안 백신의 안정성과 코로나 대응조치에 대해 어떤 반대나 의문을 공개적으로 제기하면 많은 경우, 코비드 부인자, 백신 반대자(거부자), 음로론자로 낙인찍혔다. 자연면역을 인정해 달라며 ‘백신 의무 접종’에 관한 소송을 낸 케리아티에게 사람들은 ‘당신은 백신 반대자’냐고 묻는다. 그는 그와 같은 질문이 ‘당신은 약을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 같은 질문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 “어떤 약을 어떤 환자 혹은 환자들에게, 어떤 상황에서, 그리고 어떤 적응증에 쓴다는 말인가. 모든 상황에서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그런 약이나 백신은 결코 없다.”(209쪽) 백신의 안정성에 의구심을 품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는 백신 접종 후 부작용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 상당수 있다. 그들이 백신 반대자면 애당초 왜 백신을 접종했겠는가. 지시를 충실히 따르고도 피해를 입게 된 상황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등의 근본적인 문제는 감추고, 자신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당한 혐의를 씌어 매도하는 현실에 대한 문제 제기인 것이다.
필연론과 운명론을 넘어 공동의 노력과 연대로
케리아티는 지구적 문제에 대한 공동의 대응을 내세우는 WHO(세계보건기구), WEF(세계경제포럼, 다보스포럼) 같은 국제기구가 거대 기업과 특정 재단으로부터 엄청난 자본을 지원받으며 유착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한다. 나아가 그와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개혁 등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지배계급들은 필연론과 운명론을 주장하며 미래에 닥칠 위험을 경고하는 것으로 공포를 조장하고, 사람들의 판단을 흐리게 하지만, 케리아티는 더 인간적인 미래를 위해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 그것은 공동의 노력과 연대로 가능하다고 확신한다. 그는 “미래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다는 걸 잊지 마시라는 겁니다. 미래는 분명히 지금 우리가 어떤 일을 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10년, 20년, 혹은 30년 안에 깨어난다면 우리는 모두 다음 세대에게 인간적이고, 살 만하고, 정의롭고, 자유로운 세상을 반드시 물려주기 위해 결과가 어찌 됐든 떨쳐 일어나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고 말하고 싶어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라는 자신의 한 인터뷰 기사로 책을 끝맺는다.
“나는 그것이 지금 당장 우리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면을 들여다보고 양심을 성찰하여 어느 땅에다 저항의 말뚝을 박을 것인지, 어디에 기준선을 그을 것인지 결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는 역풍과 압력에 부딪혀도 버틸 수 있는 도덕적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런 행동을 하면 잃는 게 있지만 모든 것을 얻습니다.”(3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