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천주교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다. 가히 한반도 분단역사와 함께 한 삶의 기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전쟁 전 평양에서 태어나 1·4 후퇴 때 두 누님을 북에 남겨 둔 채 부모님과 함께 3세 때 월남하였다. 그의 부모님은 이 두 딸을 끝내 만나보지 못한 채 얼마 전 영면하였다. 그가 이산가족으로 살아 온 신산한 삶과 이 과정에서 가졌던 기억이 평화,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관심과 활동으로 이끌었다. 그의 이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이 일제 강점, 강대국 분할 점령, 6.25 전쟁으로 인해 남의 땅에서 외로이 살아가게 된 동포들에 대한 연민으로 이끌었다. 이 책 ‘제1부 평화 순례’에는 그의 이들에 대한 연민과 역사와 화해하는 여정이 잘 드러난다.
제2부에는 그가 의정부교구장으로서, 주교회의에서는 세 번의 임기를 역임하게 된 최장수 민족화해위원장으로서 하였던 강론, 강연, 인터뷰 결과, 틈틈이 써둔 평화 단상이 수록돼 있다. 그의 이 평화 메시지에는 그가 그동안 숙성해 온 식민지, 분단, 전쟁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비극적 역사에 대한 신학적, 영성적 통찰이 담겨 있다. 단순하지만 통찰이 빛나는 그의 평화 사상에는 분단을 넘어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고 동북아에는 평화가 실현되는 종말론적 미래에 대한 비전이 들어 있다. 평생 일관되게 한 길을 걸어온 사목자만이 보여줄 수 있고 도달할 수 있는 비전이다.
그의 평화 신학과 평화 영성은 이 책 제목인 ‘평화를 주소서(DONA NOBIS PACEM)’에 함축돼 있다. 여기엔 네 가지 뜻이 들어 있다. 첫째, 이 말에는 그를 평생 이끌어 주었고 그가 기꺼이 삶을 의탁해 온 하느님에 대한 깊은 신앙고백이 담겨 있다. 둘째, 이 말에는 민족 화해와 일치에 평생 투신해 온 사람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는 탄식이자 기도가 들어 있다.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아도 끝내 마주 서게 되는 거대한 벽 앞에서 신앙인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포기가 아니라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주도권을 넘겨드리려는 겸손의 표현이다. 이는 ‘평화 영성’의 핵심이기도 하다. 셋째, 이 말에는 이산가족 아니면 느낄 수 없는 안타까움, 회한이 담겨 있다. 이런 아픔은 당사자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 말에는 희망이 담겨 있다. 희망은 포기가 아니라 좌절과 실망을 딛고 끊임없이 가능성과 미래를 향하는 불굴의 의지를 표상한다. 이 이상 그의 평화 신학과 영성을 잘 대변해 줄 말이 없다.
이 책에는 그의 평화 신학, 평화 영성도 들어 있지만 그의 삶의 기록도 담겨 있다. 짧지만 그의 삶 전체가 하느님이 주신 소명을 실현하는 과정임이 잘 드러난다. 신앙인은 한 인간의 삶을 관통하며 이끌어가는 하느님의 손길을 섭리라 고백한다. 확실히 그의 삶은 섭리가 이끌어 왔다. 신앙인은 대체로 만년에 이르러 이런 고백을 하게 되는데 이 글에서도 이런 그의 고백과 소회를 읽을 수 있다.
한국교회에서 평화와 민족 화해를 평생의 과제로 삼고 일관되게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이는 매우 드물다. 그는 이런 삶을 산 신앙인이자 사목자였다. 단연코 그는 이 길에서 독보적이다. 독자들은 한 사목자의 삶의 기록이자 한 평생 그가 추구한 평화 여정의 기록에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