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쉼터를 떠났다: 시설 너머의 삶을 꿈꾸며
“겨우 생존을 유지하는 삶이 아닌 다른 가능성으로 꿈틀대는 삶을 살아보자고. 그렇게 우리는 쉼터를 떠났다.”
윙은 1953년 설립된 데레사원에 뿌리를 두고 있는 여성사회복지단체다. 자녀 셋을 홀로 키우던 싱글맘이었던 백수남 할머니는 한국전쟁 직후 홀로된 어머니들을 지원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데레사원을 설립했다. 전쟁의 상흔이 걷히며 산업화 시대에 접어든 1960년대 무렵부터는 일을 찾아 상경한 나이 어린 여성들에게 안전한 주거와 직업훈련의 기회를 제공하는 복지사업에 집중했다. 이런 직업보도사업을 기반으로 1976년 사회복지법인 은성원으로 체제를 개편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윙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주력하는 여느 복지단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윙이 독특한 실험에 뛰어든 것은 2000년대에 들어 반성매매 운동을 시작하면서였다. 윙의 70년 여정을 기록하기 위해 펜을 든 최정은 윙 대표는 자신의 할머니였던 백수남 은성원장의 가업을 이어받으면서도 복지단체와 거기 머무는 여성들에 대한 편견을 깨는 것이 자신의 숙제였다고 털어놓는다. “나는 윙이 가족이 운영하는 복지법인에 대한 선입견과 성매매 여성에 대한 세상의 편견 모두에 당당히 맞서고 끝내 그것들을 깨부수길 바랐다.”
세간의 편견에 맞서는 일은 곧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복지의 프레임’을 벗어던지는 과정이기도 했다. 은성원의 실무자로 일을 시작한 최정은 대표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은성원이 주력해온 쉼터였다. 그는 탈성매매 여성들에게 궁극적으로 필요한 거주 공간이 쉼터라는 ‘시설’이 아닌 자신만의 아늑한 ‘집’임을 절감했다. 쉼터는 긴급한 주거 지원과 쉼, 회복을 제공하며 위기 상황에 처한 피해여성들을 보호해주었지만, 그들에게 살아가는 방법까지 알려주진 못했다. 타인의 삶이 양해 없이 수시로 공유되고, 혼자만의 공간도 허락되지 않는 한계도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 윙의 쉼터는 ‘가족적 돌봄’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방식에 기대고 있었다. 쉼터에 머무는 여성들은 손상된 가정에서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다는 결핍감에 사로잡히기 일쑤였고, 활동가들은 그들에게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주기 위해 부모 역할을 자임했다. 연민과 동정이라는 마취제 속에서 쉼터는 너무도 쉽게 가족적 배치로 고정되곤 했다. 윙은 이런 관성과 습속을 깨기 위해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는 여정을 시작한다. 가족의 결핍을 쉼터에서의 유사가족으로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넘어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 그것이 윙이 직면한 윙이 직면한 도전이었다.
주도적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윙의 언어’와 ‘윙다운’ 방식으로
“우리는 누구인가? 활동가는 무엇을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가? 친구들은 어떻게 살기 위해 이곳에 왔는가? 우리는 ‘복지 서비스’라는 기능에 매몰되지 않고자 했고, 주도적인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를 잊지 않으려 애썼다.”
윙은 무조건적인 사랑과 사명감을 전제로 하는 복지 현장을 떠나 자립과 상호돌봄의 공간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쉼터를 접고 여성의 주도적인 삶과 일상을 지원하는 자활지원센터에 집중하기로 한 결정(2011년 8월)은 윙의 오랜 역사를 새로 쓰는 첫 번째 분기점이 되었다.
‘피해자’ ‘피해여성’이라는 정체성에 초점을 두는 쉼터가 그 자체로 일종의 보호 시스템으로 작동하는 곳이었던 데 반해, 자활지원센터는 개개인이 자신의 일을 찾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울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윙은 폭력을 당했던 고통스럽고 아픈 과거가 자기 정체성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존엄성의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보았다. 피해여성들을 무기력하고 우울하게 만든 배후의 폭력에 대해 면밀히 듣고 함께 고민하되, 그들이 스스로의 삶을 일으켜 세워 사회적 연대와 관계망을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윙은 피해여성들에게 변화를 강요하는 대신, 활동가들이 직접 나서 변화의 물결을 주도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또한 시작부터 거대한 변화를 꿈꾸는 대신 일상의 작은 부분들을 세심히 되돌아보고 점검하는 데 시간을 할애했다. 이를테면 언어적 실천 같은 것들이 그랬는데, 이는 윙이라는 조직 자체를 내부적으로 성찰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윙은 윙에 머무는 여성들 개개인을 문제화하기보다 그들에 대한 윙 스스로의 인식과 태도를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실제로 피해여성들은 자신을 대상화하는 사회복지 용어들에 불편감을 드러냈다. 윙이 자신들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상담원이 관리해야 할 하나의 ‘사례’로 취급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도 이야기했다. “우리가 왜 ‘사례’예요? 우리가 물건이에요?” “우리는 왜 ‘관리’받아야 하나요?” 이런 피드백을 통해 사회복지 용어들의 폭력성을 깨달은 활동가들은 윙만의 새로운 언어들을 고민하고 벼려냈다. 윙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은 그렇게 윙의 ‘친구들’이 되었고, 윙 역시 은성원이라는 온정적이고 시혜적인 느낌의 명칭을 뒤로하고 ‘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발명했다. 여성들의 주도성initiative을 강조하는 ‘Women Initiative Networking Growing’의 뜻을 심은 윙과 친구들은 변화의 날개를 펼쳤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빵보다 장미이다: 삶을 통한, 삶을 향한 공부
“지금 당장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며 인생의 파도를 용감하게 즐기는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 그러니까 가슴속에 한 송이의 장미를 심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절실한 일이 아닐까.”
쉼터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복지사업에서 탈피한 윙은 독립형 그룹홈 더블유W, 셰어하우스 ‘상도동 우리집’ 등 다양한 주거 실험에 돌입했다. 안전하고 쾌적한 주거 공간은 친구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지만, 물리적인 환경의 변화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진 못했다. 두려움 없이 자기 자신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힘을 길러야 했다. 쉼터체제 안에서 이뤄지던 직업교육의 형태나 미술치료, 상담치료 등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전제하는 ‘치료의 문법’을 넘어선 배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윙은 친구들이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도록 분야와 방식을 막론하고 다채로운 배움을 기획했다. 대학생들과 협업해 친구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돕고, 윙만의 커리 시스템을 만들어 인문학, 창업, 각종 특강 등을 들을 수 있도록 하고, 윙만의 도서관을 만들고, 각종 글쓰기 및 여성주의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2009년 무렵에는 연구공동체 수유너머와 현장 인문학을 진행한 뒤 일부 연구자들과 손을 잡고 ‘수유너머 길’을 만들어 본격적인 인문학 프로그램을 설계하기도 했다. 연극 무대를 꾸미고, 여행을 떠나고, 조각과 사진을 배우는 등 문화예술 활동의 기회를 만드는 데도 정성을 기울였다.
공부를 향한 윙의 집념과 의지는 내면의 힘이라는 화두를 오랫동안 고민해온 최정은 대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는 가난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빵’(하루하루의 생계)보다 ‘장미’(내면의 힘)임을 한결같이 강조해왔다. 직업훈련을 가난에서 탈출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세상이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런 식의 훈련이 아닌 삶을 향한 철학적 사유임을 깨달았다고. 그가 말하듯, 그것은 “가슴속에 한 송이의 장미를 심는” 일이다.
일은 삶의 척추다: 문턱 없는 노동
“쉼과 치유가 마냥 쉬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자활의 판을 키우고 싶었다.”
윙이 생각하는 공부란 계몽이 아닌 공통의 리듬 같은 것이었다. 일상과 동떨어지지 않은 꾸준한 리듬. 친구들은 인문학을 공부하며 서로 교감하기 시작했고, 공부를 반복되는 일상으로 만듦으로써 윙이라는 공동체의 문화를 형성해나갔다. 활동가들 역시 사회복지사의 권위를 벗어 던지고 각자의 자리에서 배움을 함께했다. 모든 프로그램에 대표를 비롯한 활동가들이 빠짐없이 참여하는 윙만의 방식이 만들어진 건 그때부터였다.
같은 맥락에서 일에 대한 감각을 익히는 것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윙은 노동해서 번 돈으로 자신의 생계를 꾸리는 것을 한 명의 주도적인 여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필수 요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친구들이 탈성매매 여성이라는 사회적 낙인에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도록 모든 인력과 자원을 기울였다. 여성부 및 사회연대은행과의 삼자계약으로 시작한 최초의 창업(피부관리숍)부터 카페 겸 대안문화공간 ‘신길동 그가게’를 통한 일자리 창출, 덮밥 브랜드 ‘오덮밥’ 및 핸드메이드 제품(천연염색) 브랜드 ‘인디고핸즈’ 개발, ‘여성인권수세미’ 납품, 영상 업체 ‘여성영상미디어센타’ 설립, 10대 위기 청소년들과 협업한 ‘조잘조잘 분식점’ 등등... 친구들의 자활을 지원하기 위해 윙은 도전과 실험을 멈추지 않았다.
사회에서 열외된 여성들이 할 수 있는 사실상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능력주의를 걷어내고 삶의 태도에 초점을 맞춘다면 어떻게 될까. 아주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맡아 할 수 있는 삶의 태도만 있다면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꿈꿀 순 없을까. 윙은 이런 비전을 주저 없이 실현하고자 했고, 그래서 윙의 친구들이 어떤 상황과 조건에 놓여 있든 무조건 함께 일했다. 사회에서 만들어놓은 제한과 문턱을 이미 무수히 경험했던 친구들인 만큼 윙에서는 별다른 규정을 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쉼과 치유 그리고 자활은 서로 맞물려 있다. 쉼과 치유가 일과는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편협한 복지의 프레임일 수 있다는 것, 윙은 이 진실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친구들과 제품 브랜드를 개발하고, 창업하고, 매장에서 치열하게 일했던 순간들을 회고한 최정은 대표는 생계비를 직접 벌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키운다는 것이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라고 강조한다.
노동이 한 존재의 잠재적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활동이며, 일상을 돌보고 지켜내는 한 가지 방편이 되기도 한다는 믿음은 윙이라는 단체를 여타의 사회복지단체들과 전혀 다른 곳으로 만들어주었다. 노동에 대한 이런 관점은 윙이 친구들을 바라보는 방식이기도 했다. 윙은 자활지원센터를 잠시 거쳐 가는 일종의 ‘인큐베이터’로 설정하고 친구들을 그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하는 ‘미숙아’의 상태로 보는 것을 거부했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비빌 언덕이 필요하니까: 밥상의 진정한 의미
올해(2023년) 10월 70주년을 맞는 윙은 현재 최정은 대표가 운영하는 소셜다이닝 ‘비덕살롱’의 모습으로 윙의 오랜 터전인 신길동 주택가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다. 코로나19의 여파로 더 이상 공유 공간을 운영하기 어려워진 것이 컸다. 2021년 9월까지 운영된 복합문화공간 ‘곁애’를 끝으로 지금은 따뜻한 밥상을 지어 사람들을 초대하는 소셜다이닝 활동에 주력하고 있고, 향후 비전을 모색 중이다.
최정은 대표가 비덕살롱을 열게 된 이유는 단순하다. 오랫동안 그래왔듯, 앞으로도 윙이 계속 여성들의 비빌 언덕이 되었으면 해서다. 매장 운영, 공부, 등산, 여행, 목공, 염색 등 수많은 일들을 했지만, 그 어떤 작업보다 소중한 건 ‘밥을 짓는 일’이라고. “윙에서 보낸 지난 세월은 무엇보다 밥이 주는 위로와 의미를 체화해 일상을 단단하게 가꿔나간 시간이었기에, 그 어떤 손작업보다 밥을 하고 있는 모습이 제격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밥을 짓고 먹는 일은 자기 자신과 일상을 돌보는 일이자 그 자기돌봄을 통해 타인을 돌보는 일이며, 다양한 사람들과 건강한 관계를 지속해나가는 데 기본이 되는 활동이다. 반면 밥을 ‘가족 로망스’ 안에 가두는 일(‘엄마표 밥상’)은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 중 하나다. 그는 윙에서 무수한 밥상 차림의 경험을 거치며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 밥상을 준비한다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인 동시에 결국 나를 위한 것이라는 진실 말이다. “누군가를 위해 밥상을 차린다는 것은 자신을 위해 수도 없이 밥상을 차릴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나 자신을 사랑해야 누군가를 도울 수 있듯, 혼자 잘 살 수 있을 때 여럿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우리는 밥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는 윙을 떠난 윙의 친구들이 그 어딘가에서 자신을 위해, 또 누군가를 위해 정성스런 밥상을 준비하며 살아가면 좋겠다는 것, 그렇게 윙의 밥상이 순환되고 누구나 다른 사람에게 ‘비빌 언덕’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것이 윙과 최정은 대표의 간절한 바람이다. 바로 이것이 ‘복지’를 벗어 던진 독특한 복지단체 윙의 철학이니까.
“도움을 주는 사람과 도움을 받는 사람이 구분되지 않는 공간에서 서로 관심과 도움을 주고받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면 좋겠다. 그렇게 윙이라는 비빌 언덕에서 누구나 비덕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비빌 언덕이 필요하니까.”
함께한 이들, 함께한 시간: 윙을 거쳐 간 이들의 메시지
“제 삶은 윙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어요. 윙을 만나기 전, 저에겐 꿈도 미래도 없었죠. 윙을 만난 이후부터는 일하는 것도 즐겁고 사는 것도 즐겁고 삶의 만족도가 굉장히 높아졌어요.”
-이지혜(가명), 윙의 친구들
“자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거침없는 도전을 해온 것이 윙의 정체성을 좀 더 확고하게 만들어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정유희, 《페이퍼》 편집장
“윙에서 제 이름을 되찾았던 게 기억에 남아요. 언제나 ‘누구 엄마’로 살았는데 제가 제 이름으로 불리는 게 참 행복했습니다.”
-조미희, 윙 전 취사원
“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가 시대를 앞서 변화를 만들어왔다는 것, 어떤 도전이든 서슴지 않으며 앞서가는 결정을 했다는 거예요.”
-박신연숙, 풀뿌리여성네트워크 바람 대표
“윙에는 문턱이 없어요. 자기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면서 현재와 미래를 공유하는 경험, 밑바닥에서부터 일상을 함께 차곡차곡 쌓아 올라가는 경험을 하게 되죠. 그런 활동과 관계성을 만들어내는 곳이 윙이에요.” -권용선,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강사
“그 사람이 지닌 고유한 능력을 믿고, 스스로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주는 기관을 처음 만났어요. 정말이지 제가 윙하고 같이 인생을 살았네요.”
-이숙경,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일주일을 일주일로 살지 말고 하루씩 살라고 했던 최정은 대표님의 말씀이 기억에 남아요. 윙 70주년이 의미하는 것도 비슷한 것 같아요. 하루하루가 쌓여 70년이 되었다는 이야기죠. 그 70년 중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낸 날이 없었다는 거고요. 70년이라는 시간이 위대한 건 그래서입니다.”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저는 윙을 통해 한 명의 여성으로서 제 삶을 주도적으로 사는 방법을 배웠어요. 또 윙은 저에게 금기를 깨는 법을 가르쳐주었죠.”
-박지영, 윙 전 사무국장
“윙은 관성을 깨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어요. 어떤 길이든 일단 들어서보고 아니면 다시 되돌아가 새로운 길을 가는 그런 용기를 보여줬죠. 실험적이면서도 꾸준한 윙의 그 태도가 여성운동의 지평을 크게 넓혔다고 생각해요.”
-윤정숙, 녹색연합 공동대표·60+기후행동 전 공동대표
대부분의 시스템은 한번 만들어지면 잘 변화하지 않는데 윙은 그렇지 않았어요. 다른 사회복지시설과 달리 언제나 역동적이고 창조적이었어요.
-조진경, 십대여성인권센터 대표
한국사회에서 사회복지법인이 갖는 고정적인 기능과 역할이 있는데 윙은 그 상을 뛰어넘어 확장된 세계관을 구축했다고 생각해요. 배가 지나가면 뱃길이 생기듯, 윙의 도전과 실험도 하나의 궤적을 남겼죠. 27년간 여성 정책 연구자로 살고 있는 저에게 가장 큰 자극과 영감을 준 곳이죠. 저의 성장기를 윙과 함께 보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기쁨입니다.
-황정임,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