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하게 땅을 밟고 나아가면서 지적인 균형감을 유지하는 감각
한 권에서 만나는 《고백록》, 《오만과 편견》, 《전망 좋은 방》
‘걷기의 말들’에서 발견한 자기만의 속도로 인생을 걸어가는 법
수백 년 전에 쓰인 글에 현대의 독자가 완벽하게 공감할 수 있을까? 그 주제가 ‘걷기’라면 충분히 가능하다. 인간의 오랜 역사 속에서 변함없이 그대로인 것이 있다면 아마도 걷기의 감각이 아닐까. 《걷기의 즐거움》은 17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쓰인 ‘걷기’에 관한 글을 한 권에 모은 책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맥밀란 출판사가 선별한 서른네 편의 글들이 실려 있다. 각각의 글은 모두 걷기를 다루고 있지만, 시대와 배경, 글의 성격에 따라 놀랍도록 다양하다. 전원을 거닐며 자연과 하나가 되는 시인, 사색을 통해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철학자, 도보 여행을 창작 활동의 자양분으로 삼는 예술가도 있다. 책 속 누군가에게는 낭만적인 행위였던 걷기가 다른 글에서는 금지된 행위가 되기도 하고, 생존을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 다채로운 걷기의 말들과 산책의 장면들이 느슨하게 선별된 만큼, 유명 작가의 잘 몰랐던 작품이나 낯선 작가를 발견하는 기쁨도 있다. 《오만과 편견》이나 《워더링 하이츠》(폭풍의 언덕)에서 발췌된 부분을 읽다 보면 무심코 지나쳤던 고전 속 장면이 새롭게 다가온다.
《걷기의 즐거움》은 어디서부터 읽어도 상관없지만, 크게 네 가지 주제로 묶여 있다. 1장에서는 소로의 〈걷기〉, 버지니아 울프의 〈밤 산책〉 등 걷기 그 자체를 주제로 한, 산책자의 내면을 다룬 산문과 시를 만날 수 있다. 2장에서는 걷기란 결국 어딘가로 움직이는 것이라는 데 주목해, 포스터의 《전망 좋은 방》 속 이탈리아 여행 장면 등 익숙한 곳에서 낯선 곳으로 향하고, 홀로 또 같이 도보 여행을 떠나며, 우연과 가능성을 만나기도 하는 문장들을 만난다. 3장은 ‘걷는 존재들’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글들을 모았다. 제인 오스틴, 에밀리 브론테, 조지 엘리엇, 해리엇 마티노 등 걷고 쓰는 행위가 사회에 대한 반항이자 해방이기도 했던 여성들의 소설부터, 노예로서 생존을 위해 걸어야 했던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기록을 다루기도 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관찰자가 되어 배회하는 도시 산책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소음과 인파에 휩쓸린 위험한 보행을 묘사한 로버트 사우디의 글이나, 한밤중 불면증으로 노숙자들 사이를 헤매는 찰스 디킨스의 문장도 인상적이다.
어느 시대든, 어떤 방식으로든 길 위에서 발을 떼어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걷기에 매혹되었던 위대한 작가들이 길 위에서 써내려간 서른네 편의 글 속에서, 독자들은 자기만의 속도로 인생을 걷는 감각을 배울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을 덮고 나면, 틀림없이 자기만의 걷기를 시작하고 싶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