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가?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지 마라”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는 “행복이 무엇인지 계속 묻는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맨다면 결코 인생을 살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는 아침에 세운 계획을 오후에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아침에 위대한 것이 저녁에는 미미해지고, 아침에 진실했던 것이 오후에는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안개 속에 쌓인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찾아 헤매지 말라는 말을 기억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은 인생일 뿐이다. 우리는 오늘을 무사히 잘 마치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 것이다.
‘당신의 운명을 스스로 통제하지 않으면 남이 통제할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아무리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운명을 전적으로 남의 통제권에 맡기지는 말고 어느 정도 자신이 통제할 수 있게끔 애는 써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럴 때에 비로소 자신의 운명에 대한 사랑도 짙어질 것이다. 생존을 위한 ‘서바이벌 게임’의 포로가 되어 고단하고 고통스럽기까지 한 삶을 간신히 끌어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은 악담으로 들릴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지 않으면 어쩔 것인지 반대로 생각해보면 운명애가 헛소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강준만의 『당신의 운명을 사랑하라』에서는 세상을 꿰뚫는 아포리즘을 소개한다. 제1장은 꿈ㆍ희망ㆍ죽음 등, 제2장은 성공ㆍ냉소ㆍ영혼 등, 제3장은 위선ㆍ칭찬ㆍ신뢰 등, 제4장은 사랑ㆍ가족ㆍ아름다움 등, 제5장은 상상력ㆍ문학ㆍ유행 등, 제6장은 음식ㆍ웃음ㆍ갈등 등, 제7장은 열정ㆍ광신ㆍ진실 등, 제8장은 인간ㆍ종교ㆍ도시 등, 제9장은 지식인ㆍ진보ㆍ독서 등, 제10장은 민주주의ㆍ혁명ㆍ정당 등의 키워드다. 이 키워드들을 통해 수많은 명언을 읽고 지적 교양을 쌓아보자.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다른 사람들의 경험과 안목을 참고하는 게 좋다. 특히 수많은 현인이 삶의 다양한 풍경을 지나면서 떠오르는 문장을 간결하게 적어놓은 아포리즘은 세상에 대한 독학의 길을 열어주는 훌륭한 선생이다. 단 한 줄의 문장이 우리를 생각하게 만들고, 그 생각이 세상에 대한 생각의 폭을 넓혀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현인이 남긴 명언들을 음미해보면서 세상에 대한 여행을 떠나보자.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인가?
영국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오셀로』에서 오셀로는 질투에 불타 아내를 죽이겠다는 마음을 먹고 침실로 가서 잠자고 있는 아내를 보며 “살았을 때 냄새 맡자. 향기로운 숨결이다. 정의의 여신조차 설득당해 칼을 꺾을 만하구나. 다시 한번. 죽어서도 이렇다면 난 너를 죽여놓고 그 후에 사랑하리”라고 홀로 독백을 한다. 질투는 긴장과 흥분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드라마적 요소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는 질투가 삶 전체에 대한 의심과 불안의 성격을 띠기 때문이다. 시인 기형도는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라고 「질투는 나의 힘」에서 말했다.
냉소주의와 위선주의 중 어떤 게 더 나쁜가? 어느 것을 지목하건 사람들이 내심 갖기를 더 원하는 건 위선주의일 가능성이 높다는 건 분명하다. 힘도 없고 지위도 낮은 사람에겐 위선의 기회마저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힘을 가진 자들은 냉소적이지 않다. 자신들의 사상을 집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미국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은 “지위가 높은 사람들일수록 더 위선주의적이거나 도덕주의적일 가능성이 많으며, 지위가 낮은 사람들일수록 냉소주의적이거나 자기위안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말했다.
심장엔 이성이 모르는 논리가 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사랑에 마음의 평화란 있을 수 없다. 사랑을 통해 얻는 것은, 더한 욕망의 새로운 출발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또 영국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프리 초서는 “사랑은 맹목적인 것이다. 사랑은 눈을 멀게 한다”고 말했다. 이처럼 사랑은 예측 불허이자 측정 불능이다. 사랑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논리가 있는 것이다. 사랑이 착각이건 기만이건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미국 작가 존 치아디는 “사랑은 젊은이의 성적 흥분, 중년의 일상적 습관, 노년의 상호 의존에 딱지를 붙이기 위해 사용된 단어다”고 주장했다.
미국 신경학자 앨리스 플래허티는 창의성에 관한 세 종류의 심리학 이론을 소개했는데, 첫 번째는 정신분석학적 모델로 창의성은 무의식에 내재하고 있다는 이론, 두 번째는 창의성을 우울함에서 오는 공허감의 표현으로 보는 이론, 세 번째는 예술에서 창의성을 유발하는 것은 다름 아닌 질병이라는 이론이다. 독일 소설가 토마스 만은 “위대한 예술가들은 위대한 병자들이다”고 말하면서 질환과 예술가들의 창작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많은 예술가가 질환의 고통 속에서 창조성을 발휘했다. 이는 예술을 경외하는 사람들은 광기와 질환마저 포용할 뜻이 있다는 말이다.
신념이 정체성이 되면 설득은 불가능하다
미국 정치학자 브렌던 나이한과 영국 정치학자 제이슨 라이플러는 일부 당파주의자들이 기존 신념을 포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일단 자신의 신념이 도전받으면 그것을 더욱 강력하게 고수하는 ‘역화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입증했다. 미국 사회심리학자 레온 페스팅거는 “신념이 확고한 사람을 설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당신이 동의하지 않으면 그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사실과 증거를 들이대면 출처를 의심하며, 논리로 호소하면 논점을 오해한다”고 말했다. 급기야 미국 작가 마크 트웨인은 “그가 속았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보다 그를 속이는 일이 더 쉽다”고까지 말했다. 따라서 신념이 정체성이 되면 설득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프랑스 사회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은 “신앙의 가장 변함없는 일반적인 성격 중의 하나는 불관용이다”며 “신앙이 강하면 강할수록, 불관용은 더욱더 비타협적이 된다.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렇듯 관용은 오랜 세월 ‘내로남불’의 피해자였다. 아니 관용은 종교의 덕목이 아니라는 데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는 정치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오랜 세월 불관용의 탄압에 시달리면서 정치적 신념을 신앙처럼 여기면서 버티던 사람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불관용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둔갑하는 건 거의 법칙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