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성경책은 세상의 창조를 묘사한다. 사물보다 말이 먼저라는 것은 과학적 상식을 벗어나는 것이지만, 김춘수의 시에서도 ‘꽃’이라 부르니 비로소 내게 와 꽃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말과 사물은 불가분의 것이다. 물리학자는 세상의 탄생을 설명하지만, 언어학자는 ‘우리에게’ 세상 탄생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세상을 이해하고 풀이하는 서로 다른 열쇠를 쥐고 있다. 영화 〈컨택트Arrival〉(2017)에서 외계인들과 접촉하고 미지의 세계의 메시지를 풀어내는 임무를 맡은 사람은 바로 물리학자와 언어학자였다. 여기에 ‘에티모버스’라는 세상을 만들고 설명하는 또 한 명의 언어학자가 있다. 그는 세상(universe)을 그 처음의 이름, 즉 어원(etymology)으로 설명해준다. 사물에 처음 이름을 붙일 때 사물과 이름의 관계는 임의적이지만 동시에 개연적이다. 하나의 이름이 붙여지는 그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물들의 이름이 붙여지고,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처음 왜 그 이름을 붙였는지 기억하지 못한 채 그저 말을 할 뿐이다. 그리고 한 뿌리에서 나와 서로 다르게 변형되어가는 말들의 관계를 알지 못한 채 말을 한다. 한글, 한자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넘나들면서 언어학자 박만규는 정치·경제·사회의 복잡한 세상의 넝쿨을 헤치고, 세상을 이해하게 하는 말들의 뿌리로 우리를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