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도 진행 중인 한일 관계 토론에서 2000년과 2001년 두 가지 특별한 사건이 목격되었다. 지난 2000년 저명한 일본 역사학자 井上滿郞(이노우에 미츠오)는 “도래인이 없었다면 일본사는 200년 지체되었을 것”이라는 매우 자극적 내용의 논문을 통해 일본사에서 도래인의 특별한 위치를 강조했다. 바로 다음해인 2001년 일왕(日王) 明仁(아키히토)은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주 또는 초청된 사람들은 문화와 기술을 소개했다. 이러한 문화와 기술이 일본인들의 열정과 한국인들의 우호적인 태도를 통해 일본에 전해짐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또 이 문화와 기술은 이후 일본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일본 사람들과 문화가 한반도의 초기 사회들에 진 빚에 놀라지 않고 일본열도의 사회 발전을 검토할 수 없음은 사실이다. 서기전 1천년기 초 한반도로부터의 도작 농민의 이주는 대륙과 일본열도 사이의 3가지 중요한 기술 전파 물결 중 첫 번째였다. 두 번째 물결은 서기전 4세기경 열도에 청동기와 철기 제작기술을 들여왔고, 세 번째 물결은 서기 5~6세기경 열도에 유교와 불교는 물론 엘리트 기술자와 행정 기술을 전해주었다.
1970년대까지 도래인(주로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의 이주민)에 대한 정보는 『古事記』(712년 편찬), 『日本書紀』(720년), 『續日本紀』(797년), 『新撰姓氏録』(815년) 등 도래인 관련 실제 사건들보다 한참 나중에 편찬된 몇몇 고대 사료들에 주로 기반했다. 그러나 일본열도 전역에서 수행된 대규모 구제고고학 발굴 덕분에 1980년대 초부터 유례없는 양의 고고학 자료가 수집되고 분석되면서 도래인의 기원, 취락, 생활, 초기 일본 사회와 초기 일본 문명에의 기여 등 도래인과 관련된 많은 부분이 밝혀지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지난 40년 동안 남한에서 이루어진 발굴 역시 도래인의 역사적·사회문화적 배경과 관련된 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정보의 해석, 즉 한반도의 주민들이 어디에서, 언제, 왜 이주했고, 또 이주민과 그 후손들이 일본열도의 주민 구조와 물질 문화를 어떻게 변하게 했는지를 입증하는 것이 본서의 과제이다. 이러한 기술 이전과 주민 이동의 물결은 선사시대에 드물지 않으며, 영국제도의 역사는 그 좋은 사례로 인식된다. 한반도의 주민들 역시 중국 본토, 스텝 지역, 그리고 동북아시아로부터 파생된 물결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이 당시와 지금 한국과 일본에 고유문화(uniqueculture)가 없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철새의 휴지 기간은 반도/섬에 토착화된 새로운 형태의 물질 조성과 사회적 행동의 자율적 개화를 가능하게 했다. 본서에서 다루는 시간대는 서양 문화가 탐욕스럽게 수용되고 소비되던 일본의 明治時代(메이지시대. 1868~1912)와 비견될 수 있다. 오늘날 일본의 외형이 노골적으로 서구적이라고 해서 고유한 일본 문화가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본서는 일본 문화의 폄하(貶下)가 아닌 일본 역사의 일부 뿌리와 요소의 설명을 시도했다.
4C~5C 한반도의 호전적 집단에 의한 열도의 정복과 지배를 말하는 일본 내외의 사람들(江上波夫, Ledyard, Covell and Covell, 홍원탁)이 있다. 한편 초기 일본은 침략을 통해 한국의 선진 문화와 기술을 획득하여 사회 발전을 이룩했다는 한 무리의 사람들(末松保和와 추종자들)은 주로 일본인들이다. 사실 반도와 열도 사이의 초기 관계사는 이보다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고, 가변적이며, 국가의 지원을 받은 대규모 군사적 침략의 증거는 양측 모두에서 확인된 바 없다.
이러한 관계들을 풀어내는 작업은 매우 흥미로우며, 매년 새로운 발굴과 분석은 이전보다 더 깊이 파고들 수 있게 해준다. 도래인 이야기는 일본의 시작이란 미스터리들이 담긴 상자를 여는 중요한 열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