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없는 정치는 가능하지 않다!
“최상의 정치체제에서 시민이란
지배받고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이며,
덕에 입각한 삶의 방식을 목표로
그 양쪽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를 말한다.”
제3권 제13장 1284a1-3
정치철학에 대한 근본 문제를 제기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근래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대한 관심이 사그라들었다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일지 모른다. 민주정에 대한 비판, 남성 지배적 권위주의, 여성에 대한 경멸, 노예제 수용, 문화 및 언어에 따른 본성적 인종주의, 한 공동체에서의 엄격한 시민권의 제한 등등. 즉, 오늘날의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진 특정한 이데올로기 때문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있다. 『정치학』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철학에 대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적 공동체(폴리스, 국가)는 어떤 기원을 통해 형성되고, 그 목적은 무엇인가?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 조건은 어떤 것인가? 어떤 근거에서 우리는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살아가야 하는가? 한 공동체에서 정의는 어떤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정치적 정의와 경제적 정의는 어떤 관련성을 맺고 있는가? 어떤 자격을 갖춘 자가 지배자가 되어야 하는가? 그 정당성은 무엇인가?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민주주의는 수정 가능하지 않은 정치체제인가?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는 완벽한 것인가? 시민 교육은 공교육 체제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궁극적인 마지막 물음!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정치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체제에 대해 냉정하리만치 중립적인 태도와 관찰자적 입장을 취한다. 그는 아테네에서 시민이 아닌 거류외국인 신분으로 지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에서 오래 살았지만 아테네 시민이 누리는 정치적 권리를 갖지 못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이상적 폴리스’는 고향 스타게이라의 환경과 입지, 영토의 크기, 인구 등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보인다. 폴리스의 크기와 규모를 논하면서 그가 제시한 한계 규정들, 즉 자족한 상태로 삶을 경영할 만큼의 인구수, 시민들이 서로를 쉽게 알아볼 정도의 인구 규모, 한눈에 전체를 살필 수 있는 크기의 영토를 비롯하여 생산물자 수송에 용이한 바닷가를 끼고 있어야 한다는 것 등은 스타게이라의 지역적 환경과 유사하다. 또한 『정치학』에 나타나는 자연주의적 경향과 생물학에 대한 관심은 의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추정된다. 이에 기초하여 『정치학』에서 피력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자연주의의 기본 테제는 이런 것이다.
첫째, 인간은 자연적으로(본성적으로) 폴리스적 동물이다. 둘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존재한다. 셋째, 폴리스는 자연적으로 개인에 앞선다.
오랜 기간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에 머무르며 철학을 공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 철학을 면밀하게 접하고,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주요 정치적 저작 『국가』, 『정치가』, 『법률』에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도 자신의 주요한 정치적 사상과 정치적 개념들을 『국가』, 『법률』 등에서 차용하고 있다.
국가 경영 기술을 포함하고 있는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보여준 치열한 논의와 철저한 반성은 아직도 유효하며, ‘국가’라는 공동체 속에서 우리가 풀어가야 할 여전한 숙제일 수밖에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사상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배울 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일 것이다. 정치적 정의와 법치에 근거한 정치적 행위, 정치적 공동체에 시민 참여를 의무로 부과하는 것, 공교육에 대한 적극적 의미, 그리고 공동체 속에서의 개인과 전체의 행복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것을 성취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
정치와 경제를 한데 아우른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의 효시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은 여전히 철학자뿐만 아니라 정치경제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다. ‘정치학’의 창시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에서 표명한 정치이론은 어떤 의미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적 관심이란 측면에서 그의 『정치학』에 빚지고 있는 정치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다. 나아가 국가를 경영하는 기술을 포함하는 그의 정치이론에서 현대 정치학에 기여할 시사점을 찾아내는 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다.
정치가는 반드시 ‘좋은 인간’이어야 한다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뜻에 따르는 정치체제를 위하여
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고, 정치적 공동체는 인간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해 만들어진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동물인 셈이다. 따라서 인간은 정치적 행위를 통하지 않고는 행복을 성취할 수 없다. 자유롭고 동등한 시민은 지배하고 지배받음으로써 정치적 행위를 수행하고, 지배하는 사람은 전체 공동체의 행복을 지향하기 때문에 정치가, 즉 입법가는 시민을 ‘좋은 시민’, 나아가 ‘좋은 인간’으로 만들어야 한다.
원칙적으로 보면 좋은 시민과 좋은 인간의 덕(탁월성)은 다르다. 그러나 정치적 동물로서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좋은 시민’, ‘좋은 인간’이어야 한다. 폴리스는 인간을 좋은 시민, 좋은 인간으로 교육시켜야 한다. 무엇을 교육시키는가? ‘아레테’(덕)이다. 특정의 실용적 목적을 위한 아레테만이 아니라 ‘좋은 인간으로서의 인문적 삶’, 다시 말해 ‘철학적 활동’이 가능한 여가 활동(scholē, diagōgē)을 하며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덕적 성향을 지닐 수 있는 덕을 가르쳐야 한다.
정치가는 반드시 ‘좋은 인간’이어야 한다. 정치 지도자가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공동의 이익을 위해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국가는 ‘정치적 정의’(to polkitikon dikaion)를 실현하는 공동체다. 정치적 정의를 실현해야 하는 관직에 봉사하는 정치가들이 현실적으로 다 훌륭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가 교육에 개입해서 ‘좋은 시민’과 ‘좋은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어릴 적부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뛰어난 개인의 능력이 전체와 조화하지 못한다면, 그 개인은 공동체 전체의 이익과 행복에 기여할 수 없다. 가장 아름다운 눈, 귀, 입, 코를 한 얼굴에 채워 넣었다고 해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그렸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평등한 눈, 귀, 입, 코를 통해서 전체의 조화를 이루었을 때, 그 얼굴은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될 수 있다(「정치학」 제3권 제11장 1281a39 참조).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인간의 훌륭함과 전체를 구성하는 시민들의 훌륭함을 만들어 가는 것을 교육의 목적으로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의 ‘평등성’을 강조하는 선구자가 되는 셈이다. 그 교육의 담당자가 바로 입법가며 정치가다.
최근 학교 제도가 붕괴되고 있는 한국의 교육 현실에서 교육의 목적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치철학적 의미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하는 이상적 폴리스는 도덕적 인간과 정치적 인간의 교섭적 관계에서 성립하는 도덕성에 기반한 윤리적 정치체제의 질서다. 그가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정치체제는 어떤 정치체제일까? 시민의 도덕성, 시민의 평등성, 시민 자신의 이익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시민의 총의에 따르는’ 정치체제일 것이다. 또한 폴리스(국가)의 도덕성을 강조한다는 의미에서 그의 정치철학적 국가 이론은 신자유주의적 경제 질서를 기반으로 이윤을 극대화하는 오늘날의 정치체제와는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치학』을 저술한 궁극적 목적은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덕 있는 삶과 고귀한 삶’의 진작을 위해 폴리스(국가)를 새롭게 개조하려는 작업을 완결하고자 함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