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의 무희에서 세계의 무희로, 그리고 이제는 전설의 무희가 된 최승희
최승희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150회가 넘는 세계 순회공연을 하고 나서 ‘세계의 무희’라는 수식을 얻게 되었다.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의 일이다.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서 끝도 없이 기차 여행을 해야만 하는 험로였다. 최승희의 말에 의하면 세계 순회공연 중 지나온 길은 3년 동안 10만 마일, 약 16만 킬로미터에 이를 정도였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이었다. 한두 해 정도 외국여행을 다녀온 이들은 있어도 공연을 위해 3년 동안 세계 여러 나라를 순회한 이는 당시로써는 전무했다. 게다가 ‘호평’을 받을 정도였으니 대단히 특별한 일이었다. 미국, 유럽, 남미까지 순회하는 대장정이었다.
조선무용이 서양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알 수 없을 때였다. 조선과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지만, 서양인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다. 최승희는 자신의 완성된 무용을 세계무대에 올리는 것보다는 먼저 서양의 무용을 배우고 오겠다는 입장이었다. 조선무용에 서양식 기법을 반영해 만든 창작 무용에 몰두해 있던 최승희는 새로운 서양의 기법을 어떻게 도입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서양 발레를 배우고 일본 신무용의 영향 속에서 성장한 최승희는 그 누구보다 ‘창작열’이 높은 안무가이기도 했다. 조선과 서양을 접목하려던 시도는 처음부터 완전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로써 조선무용은 최승희을 통해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서양의 관심은 오로지 조선무용에 집중되었다. 서양에 없는 춤이기 때문이다. 어설프게 서양을 모방한 춤이 아니라 고유한 민족적 정체성이 새롭게 극화된 무대였기에 최승희의 공연은 구미 여러 나라를 오가며 숱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전통무용의 대가 한성준이 그간 조선에서는 춤을 추는 사람을 천한 예인으로 인식했고, 그래서 대중 앞에 설 용기도 내지 못했다고 할 정도로 조선에서 무용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은 수준이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 창립을 알리는 회견 장소에서 최승희와 함께한 한성준은 “무용에 대하야 이해 없든 조선민중도 최승희 씨의 놀나운 무용으로 하야곰 조선무용을 재인식하게 되엿스니 그 깃붐은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고전 「무용」과 「음악」을 부흥식히고저, 최승희 한성준 양 거장 회견」, 《삼천리》 1938년 1월호)라고 한 바 있다. 최승희는 누구나 천하게 여기던 조선의 춤을 당당하게 세상에 내놓았고, 급기야 세계의 호평을 받으며 3년이라는 기간 동안 150회 이상의 공연을 올릴 수 있었다.
최승희가 서양에서 배운 것은 자기 민족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민족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삶과 역사가 아닌 다른 것은 진정한 자기의 예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자리가 마련되었을 때 점차 ‘동양’으로 외연을 넓힐 수 있으며, 그렇게 ‘세계’와 만나게 되리라는 점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