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전히 ‘혼자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가능하게 할까?
“19호실로부터”의 여정
예술을 경유해, ‘여성’의 ‘자기다움’과 ‘안전한 공간’을 모색해가는 사유와 실천이 담긴 책 『19호실로부터』가 출간되었다. 『19호실로부터』는 2022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의 다원예술 분야에 선정된 동명의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나온 책이다. 예술활동가 제람, 문학평론가 오혜진, 시각예술 기획자 여혜진, 공연예술 기획자 고주영, 장애연극인 김지수, 트랜스젠더 활동가 박에디, 섬유예술가 무아, 글 짓는 사람 드므의 글을 더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19호실로부터”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 「19호실로 가다」의 제목을 뒤집어 만든 이름이다. 설치미술, 영상, 서체, 출판, 워크숍, 전시 등 다양한 매체와 형식을 빌려 성소수자 군인, 난민, 미등록 이주민, 농인, 청소노동자 등의 서사를 조명해온 예술활동가 제람이, 소설 「19호실로 가다」를 읽고 나서 나만의 19호실로 가겠다고 선언한 어머니의 일을 사유한 끝에 구상한 프로젝트이다. 제람은 그간 이어온 일련의 예술활동 작업에서 소수자로 여겨지는 집단 안에서도 ‘여성’이 한층 소외당한다는 것을 포착했다. “일상에서 자기에게 ‘안전한 공간’을 찾지 못해 어딘가로 가야 하는 이들이, 대체로 ‘여성’으로 호명된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렇다고 모든 여성에게 ‘19호실’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19호실’을 갈망하는 ‘여성’을 지정성별이 여성인 사람과 같다고 말할 수도 없고, 한정할 수도 없다. ‘19호실’로 가서 삶이 끝나는 게 아니라, 일상을 이어갈 동력을 마련할 수 있을지 사유해 보고 싶었다”(78~79쪽).
2022년 봄가을엔 작가 은유와 함께하는 두 차례의 ‘글쓰기 워크숍’을, 여름에는 안무가 공영선과 함께하는 ‘몸쓰기 워크숍’을, 겨울에는 다섯 예술가(공영선, 노윤희, 여혜진, 제람, 홍초선)의 작품을 설치한 ‘19호실’을 제주에 만들어, 1박 2일간 홀로 머물며 관람하는 ‘숙박형’ 전시 〈19호실로부터〉를 열었다. 필자들은 이 프로젝트에 기획자나 운영자, 참가자로 참여한 이들로, 프로젝트를 관통하며 길어 올린 ‘자기다움’과 ‘안전한 공간’에 대한 각자의 사유와 실천을 저마다의 화법으로 책에 풀어놓았다.
혼자가 되는 시간에서 찾는
나다움과 안전함의 감각
역할과 의무에서 벗어난 공간
〈19호실로부터〉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로도 참여한 시각예술 기획자 여혜진은 “무엇이 되지 않아도 되고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역할과 의무에서 벗어난 공간”을 ‘19호실’로 규정했다. 그는 ‘19호실’이 ‘안전’을 인식하거나 ‘자기다움’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무에 갇히지 않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다. 여혜진은 ‘19호실’ 공간에 있는 듯 없는 듯 놓인 여러 작품들을 작가의 의도에 기획자의 해석을 더해 설명한 끝에, 예술이야말로 ‘혼자’ 있는 시간의 감각을 가장 잘 안내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기존 전시의 문법과는 길이 다른 〈19호실로부터〉 전시의 실천 또는 실험은 답을 강요하거나 단정 짓지 않는 예술의 화법 안에서, 저마다 ‘자기다움’을 경험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을 확보한다.
홀로, 또 같이 있다는 공공의 감각
〈물고기로 죽기〉 〈래러미 프로젝트 & 십 년 후〉 등의 연극을 기획, 제작한 공연예술 기획자 고주영은 전시의 자문 및 공간 운영자로 참여했다. 제주의 ‘19호실’ 바깥채에 머물며 익명의 관객(방문자)이 머무는 공간을 살뜰히 정비한 그에게 ‘19호실’은 혼자만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되 무해한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안전의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비대면 체크인-체크아웃이라 거의 모든 방문자의 얼굴이나 정보를 알지 못하는 상황. 그는 창으로 새어나오는 불빛이나 눈길에 난 발자국으로 ‘19호실’에 찾아온 이의 안부를 살핀다. 고주영은 일본의 소도시 우에다에서 경험한 문화예술 공간의 공적 활용 사례를 소개한다. 문화예술 공간을 개방해, 팬데믹이나 가정폭력 등으로 곤란을 겪는 사람이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들이 묵을 수 있게 한 것이다. 피난처와 쉼터로 기능하는 타국의 공공 공간이 환기하는 바는, ‘19호실’이 필요한 사람이 어디든 있고 ‘19호실’을 제공할 방법이 얼마든 있다는 점이다. 일본 우에다의 사례처럼 한국에서도 ‘19호실’이, 공공의 영역에서 기획돼 예술의 차원으로 구현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시당하지 않는 안전함
장애연극인 김지수는 ‘19호실’에 묵으며 오래전 혼자 나선 여행길을 회상한다. 휠체어를 타고 혼자 여행 온 장애인을 대단하다거나 걱정스럽다는 듯 바라보며 수시로 객실을 노크해 불편한 게 없는지 확인했던 숙소 직원은 그가 혹시 극단적 선택을 하러 온 게 아닐지 직원들끼리 긴장했다는 말을 전했다. 김지수는 편견 어린 눈으로 나를 주시하는 사람이 없어 ‘나답게’ 자유로울 수 있는, 그러나 언제든지 도움 청할 사람이 근처에 있어 ‘안전한’ 상태를 ‘19호실’이라고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환대하는
MTF(Male to Female) 트랜스젠더 당사자 활동가인 박에디는 대부분의 여성은 그리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트랜스젠더 여성인 자신은 스스로 ‘여성’이라 정체화할 수 있음을 우선 밝힌다. 그는 ‘19호실’ 복층이 외부에서 들여다보이는지 확인한 뒤 옷을 벗고 공간을 유영한다. 그에게 ‘19호실’은 남들이 말하는 정상성을 의식하느라 늘 부족하다고만 여겼던 자기 몸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자기만 아는 마음의 상처를 보듬는 위로의 공간이다. 그는 전시를 떠나 집으로 가는 길에, 자기를 있는 모습 그대로 환대하는 친구와 이웃이 있는 곳이 ‘19호실’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공간과 관계적 공간을 아우르는
예술의 실천과 모험
“익명적 존재”의 자기만의 장(場)
무아와 드므는 첫 번째 글쓰기 워크숍의 참가자들이다. 프로젝트 기획 단계에서부터 맡은 자리가 있었거나 책을 위해 일찌감치 섭외된 다른 필자들과 달리, 「19호실로 가다」의 수전처럼 스스로 19호실에 찾아든 “익명적 존재”인 셈이다. 네 차례에 걸친 글쓰기 워크숍을 통해 완성한 한 편의 자기서사 글 외에는, 책의 필자로 초대하고부터 출간이 임박한 시점(책 표지에 넣을 약력을 확인하기)까지 아무런 정보를 알지 못했다. 이들이 누구이며 봄의 글쓰기 워크숍과 겨울의 전시 관람을 거쳐 이듬해 봄의 집필까지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그리하여 어떤 글을 쓰게 될지 알지 못한 채 필자로 초대한 것은 책의 모험이자 불가결한 실천이었다. 무아와 드므는 아픈 몸과 함께 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특별히 초대된 두 필자는 뜨개 작업과 모임을 통과해 자기 몸의 쓸모와 특성을 돌아보고(무아), 진공과 멸균과 순백이 담보할 수 없는 ‘안전한 공간’에 대해 질문하는(드므), 솔직하고 치열한 자기서사를 이 책에 보태주었다.
안전한 예술, 안전한 공간, 안전의 역설
기획자 제람과 두 차례의 대담을 가지며 기획 단계부터 프로젝트에 참여한 문학평론가 오혜진은 이 책의 마지막 글에서 날카롭고 경쾌한 비평으로 혹자가 품었을 모든 의문들을 헤집는다. 그는 최근 예술 실천의 중요한 키워드가 된 ‘안전’과 ‘무해한 예술’에 대해 질문한 다음, ‘안전한 공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해온 제람의 작업과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의 면면을 분석한다. 제주의 ‘19호실’에서 “안락하고 쾌적한 공간”이 보장하는 ‘안전’을 구성하는 것들(“사전 협의와 참가자들의 선의 또는 시민교양, 조율된 규칙들”)에 위화감을 느끼기도 하고, 이를 거슬러 위반해보려는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나’의 자기다움을 찾기 위해 안전한 공간을 찾아왔는데, 그 공간의 안전은 내가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존재로 간주되게 확보된다는 역설”(221쪽)을 성찰하기 위해 정동이론의 ‘약속’과 아즈마 히로키의 ‘오배’ 개념을 관통한 그는 밭작물을 위해 조도를 낮춘 제주의 어둔 밤길을 통과한 끝에 ‘약속된 어둠’ 속에 아늑하게 묻히는 법에 도달한다. 나름의 사유를 정리하려던 독자의 허를 찌르는 오혜진의 예리한 비평은 정해진 답이 없으며, 끝이 아니라 과정에서 우리가 만나고 있음을 다시금 상기시킨다.
“모든 안내는 따르거나 따르지 않아도 된다”
책의 도입 ‘전시’와 마지막의 ‘부록’에는 사진가 이민지가 촬영한 전시 〈19호실로부터〉의 화보와 전시에서 제공된 식사 레시피가 수록돼 있다. 각 사진에는 별도의 캡션을 다는 대신 숫자 기호(①②③…⑯)를 달아, 관련 본문과 사진을 연결해 볼 수 있게 했다. 독자들은 본문에 등장하는 숫자 기호로 해당 이미지를 찾아봐도 되고, 무심히 지나치거나 따로 떨어뜨려 훑어봐도 된다. “모든 안내는 따르거나 따르지 않아도 된다”(여혜진)라는 전시의 지침처럼, 직결이 아니라 ‘선택’에 의해 이미지와 텍스트를 만나길 바랐던 편집의 의도다. 아예 이 연결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한 글(「낯선 어둠 속에 아늑하게 파묻히는 법」)에는 아무 기호도 달지 않았다.
끝이 아니라 시작
어머니가 왜 자기만의 ‘19호실’을 찾았는지, ‘19호실’이 필요한 ‘여성’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19호실’이 어떤 공간이어야 할지 알고 싶어 시작된 이 여정은 앞으로 어디로 향하게 될까. 나의 ‘19호실’과 타자의 ‘19호실’을 사유하고 실천하는 이 과정이 모두에게 어떤 기획의 아이디어를 줄 수 있을까. 제람은 책을 통해 앞으로도 구체적인 일상의 토대로서 ‘안전’이 무엇일지 공통의 생각과 감각을 벼리고 싶다고 말한다. 올 하반기엔 인천과 강화도로, 내년엔 또 다른 곳이나 해외로 장소를 옮겨, ‘19호실’ 프로젝트를 이어갈 계획이다. 이 책은 여정의 끝이 아니라 시작으로서 기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