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판결비평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2005년부터 ‘판결비평-광장에 나온 판결’이라는 이름으로 판결을 선정해 비평해오고 있다. 최근 판결 중 사회 변화의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거나 국민의 법감정과 괴리된 판결, 반인권적·반민주적 판결, 또는 인권 수호 기관으로서 법원의 위상을 정립하는 데 기여한 판결 등을 선정해 비평한다. 법률 전문가 집단에서만 이야기되던 판결의 논리와 쟁점을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 시민들과 함께 다양한 의견을 나누고, 판결의 사회적 의미를 되새긴다.
◎ 공권력에 대한 사법 감시
동성 배우자의 제도적 사회보장은 불가능하나, 성전환 군인의 강제 전역은 옳은가, 장애인의 필요 시설 접근권은 소매점까지 확장되는가, 공정거래법상 일감 몰아주기 규정에서 ‘부당성’을 별도로 입증해야 하나, 발달장애인은 투표보조를 받을 수 없나, 점자 선거공보는 면수를 꼭 줄여야 하나, 아파트 경비노동자의 변칙적 휴게시간에 대한 임금 지급은, 베트남전쟁에 파견된 한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피해자 유족들의 손해배상을 인정한 의미는, 미군 기지촌 ‘위안부’ 제도에 대한 국가 책임은, 가명 처리한 정보도 보호 대상의 개인정보인가, ‘공소권 남용’에 대한 판단은 재판의 전제가 돼야 하지 않나, 해외 콘텐츠 제공자들은 망 사용료를 내야 하나, 난민과 비난민으로 갈라진 어린 아들과 아버지의 운명은, 북한 회사가 남한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면?
당신은 선정한 사건에 물음표를 달 것인가, 느낌표를 달 것인가. 재판은 공권력의 작용이다. 그래서 그 결과를 나오는 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사법 감시의 눈으로 검토해야 한다. 보통의 삶을 법과 제도라는 틀에 어떻게 맞추는지 검증해야 한다. 뒤늦게 청문회라도 할 수 있다면 그렇게 검증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판결비평은 단순한 설명에 그치지 않는다.
우리 일상의 삶이 법원 주변에 모여들어 사건으로 바뀌고 세상의 모든 일이 법원에서 결론을 맺는다는 점에서 판결은 삶에 대한 사법적 인식이다. 그 인식에 물음표를 달든 느낌표를 달든 표시하고 주장해야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시민들의 평범한 삶이 부당히 대우받는다면, 사법이라는 허울을 쓴 정치에 의해 멋대로 재단된다면, 마땅히 의견을 내야 다른 미래를 기대할 수 있다.
◎ 사법권력의 존재 이유를 묻다
위헌인데 합법이다? 헌법에 위배되지만 처벌할 수 없다? 판결문을 읽다 보면 아무리 읽어도 이해되지 않는 대목이 나온다. ‘논증’이라고 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사법의 언어는 궤변의 언어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이 ‘합법적 불법’을 위한 법기술은 아닌지, 법원은 사법 농단 사태처럼 제 식구를 감싸기 위해 법률 해석 기계로 돌변하지 않는지 묻게 된다. 사법적 판단이라는 것이 법률의 이름으로 그 합법성을 가공해내는 법원의 안간힘이 아닌지, 형식은 법치주의를 말하고 절차적 공정성을 내세우지만 그 실질은 권력의 전횡을 정당화하는 게 아닌지, 사법의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정치 사법의 위험을 자초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시민들에게 판결은 여전히 낯설고 멀다. 그러나 사법권력도 애초 주권자인 국민이 법원에 위임한 권력이 아닌가. “사법권력은 선출되지 않는다. 선출되지 않고도 권력을 인정하는 이유는 비선출 권력의 ‘논증’이 선출 권력의 ‘정치’와 다른 논리를 갖기 때문이다. 집합적 다수가 표출하는 집단적 의사 결정의 오류 가능성을 논증을 통해 사후적으로라도 교정하고, 정치 과정에서 무시될 수 있는 소수의 의사도 존중하겠다는 헌정의 오랜 지혜다. 사법권력의 존재 이유는 ‘논증’이다.”(92쪽)
그런 점에서 시민들에게는 법원의 판단을 지켜봐야 할 책임이 있기도 하다. 그러려면 판결에 담긴 법리와 논증을 따져봐야 한다. 시민들의 시선에 판결에 담긴 법리와 논증이 합당하지 않다면 그런 비선출 권력이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시민들은 사법의 언어가 “이 비뚠 세상을 교정하는, 푸른 칼날 같은 당위의 언어”(19쪽)이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