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상옥은 어린 시절 대장간에서 일하며 야간학교를 다니며 꿈을 이루기 위해 공부한다. 야간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야학을 만들고 일하는 청소년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며 자신도 공부를 하였다.
유학의 꿈을 갖고 영어 공부를 하고, 기독교 서점 운영과 전국을 다니며 권서 일 을 하여 모은 돈으로 동대문에 형제들과 동대문에 ‘영덕철물점’을 열고, 50명의 직원을 두는 큰 제조업 회사로 성장하며 사업가로 성공한다. 3·1운동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비밀 독립단체‘혁신단’ 조직 ‘혁신공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 고취 및 독립사상 계몽에 전념하다 일경(日警)에 잡혀 종로경찰서에서 40여 일간 고초를 당한다.
‘혁신단’을 중심으로 ‘암살단’을 조직하고, 미국 의원단 내한에 맞추어 대대적인 일제 고관 처단, 기관 파괴 거사를 추진하다 당일 오전 예비검속으로 탄로나 실패하고 2달 간 경성에서 은신하다 10월 말 만주로 망명 한다.
상해에서 임정요인 들과 독립운동에 대한 많은 논의를 하며, 국내로 들어와 모은 독립 자금을 임시정부로 가져갔다.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3·1운동 이후 모여들었던 독립 운동 지도자들이 거의 떠나고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김상옥 의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임시정부를 공격하는 사람들로부터 임시정부를 지키고자 하였다.
1922년 임정 요인들과 총독주살 및 ‘총독부 폭파’거사 협의 후 12월 초 서울에 잠입.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독립운동 탄압 본거지인 종로경찰서 폭파, 조선총독부와 경찰을 놀라게 한다. 서울 시내에 비상경계망을 펼쳤으나 범인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일본의회에 참석차 동경(東京)에 가는 사이토 총독을 서울역에서 처단코자 은신 중 1월17일 은신처에 일본 형사대 21명이 기습, 총격전에서 4명 처단, 일본 군경 1,000여 명이 포위한 대설 쌓인 남산을 종단 탈출, 왕십리 안정사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고, 짚신을 거꾸로 신고 시내 잠입한다.
1월22일 효제동 생가(72번지) 옆 이혜수 동지댁(73번지)에 은신, 동상 치료 중 적(敵) 군경 1,000여명이 삼엄한 경계 속 4중 포위하자 2정의 권총을 양손에 쥐고, 생가 주변 다섯 집(효제동 72, 73, 74, 75, 76-2번지)을 넘나들며 3시간 여 혈전 끝에 적 16 여명 이상 처단, 마지막 남은 1탄으로 자결 순국 (34세)한다.
일제 강점기 암울했던 시기에 김상옥 의사가 펼친 독립운동은 국민들에게 희망을 보여주며 우리 민족의 애국애족의 정신을 고취 시키는데 앞장선 위인이다. 김상옥 의사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용맹은 온 국민들과 어린이들에게 큰 교훈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