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형이란 무엇인가
“표현형”이라는 단어는 리처드 도킨스의 역작 『확장된 표현형』을 통해 널리 알려진 단어지만, 그럼에도 대중들에게는 아직 낯선 개념이다. 우리 몸의 설계도라 할 수 있는 유전자는 집단이 되어 유전형genotype을 형성하는데, 특정 환경에서 유전형이 표현되는 각각의 형태를 표현형phenotype이라고 한다. 이 용어를 처음으로 제안한 덴마크의 식물학자 빌헬름 요한센은 이를 “유기체에서 관찰할 수 있거나 측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쉽게 말해, 표현형은 당신이 방금 만난 사람의 모든 특징이다. 그리고 우리의 유전자가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은 환경에 따라 달라진다. 눈동자의 색과 같은 표현형의 일부 요소들은 고정되어 있지만, 키나 몸무게 같은 표현형은 환경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또한 어떤 사람의 매력, 성격, 지성과 특징도 환경의 체에 걸러지고 인생 역정의 손에 빚어진 유전자의 표현이다. 춤추는 무용수가 음악과 하나 되듯, 유전자와 환경도 하나로 어우러진다. 이 둘을 구별하려는 시도는 헛수고다. 이 상호작용의 생물학적 원리는 복잡하고 논쟁적이고 여전히 수수께끼다.
에드윈 게일은 당뇨병 연구의 권위자로서, 현대 사회에서 왜 당뇨병이 이토록 빨리 증가하는지 의아해하다가 인간 유전자의 복잡한 표현형 변화에 관심을 가졌다. 당뇨병이 달라지는 게 아니라, 우리의 몸이 우리의 조상들과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변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해, 그리고 이러한 유전자 가소성이 인간이라는 종 스스로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신체적 · 정신적 변화에 깃든 표현형의 역사
에드윈 게일이 주목한 것은 우리의 변화 가능성이 생각보다 훨씬 더 무궁무진하다는 것이다. 인간은 매우 복잡한 생물이기 때문에, 그 변화의 폭이 단순히 크키나 색깔이 달라지는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신체적 변화와 함께 정신적 변화 역시 주목할 만한데, 당연하게도 뇌는 인체 장기 중에서 가소성이 가장 크다. 면역계도 학습하고 기억할 수 있지만 생각은 오직 뇌만이 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학습 프로그램을 그저 업로드하는 게 아니라 새롭게 창조하며, 학습한 기술을 자동화될 때까지 끊임없이 재구성한다. 바로 여기서부터 인류의 무한한 가능성이 멀리 뻗어나간다.
그러나 책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변화는 기상천외하고 허황된 청사진이 아니다. 우선 에드윈 게일은 인류의 역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을 되짚어보며, 우리가 변해온 과정과 이유들을 차분히 설명한다. 그리고 경작을 시작하고, 기술을 개발하고, 굶주림을 극복하고, 병을 이겨내고, 인구를 늘리고, 수명을 늘리고, 교육 수준을 높이는 기본적 변화들이 사실은 유전자 표현형과 떼놓을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한다.
인간은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곡물을 먹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기아에서 벗어났다. 곡물로부터 구조탄수화물을 섭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소화를 돕는 장내 유산균들과 공존하면서 마침내 자연선택을 벗어났다. 음식물을 익혀 먹게 되면서 위턱이 뒤로 물러났으며 아래턱은 작아지고 돌출했다. 얼굴이 납작해진 덕에 얼굴 근육으로 다양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언어와 노래가 탄생했다. 사교술이 번식 성공의 관건이 되어 이른바 사회적 뇌의 진화를 이끌었다. 우리가 초대형 뇌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음식을 익혀 먹은 덕분이다.
시간이 흘러, 20세기에 일어난 농업 혁명으로 인해 더이상 식량이 부족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공기 중의 질소를 비료로 전환하는 기술이 단연 으뜸이었다. 우리에게 배고픔을 잊게 해준 교잡종 작물은 질산염으로 재배되었으며 살충제를 비롯한 화학 기술 덕분에 수확량이 늘었다.
이렇게 다가온 풍요의 시대는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우선 아동의 사망이 줄었다. 20세기 전반만 해도 “다섯 낳아서 둘을 보내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으나, 산모의 건강 상태가 좋아지자 태아도 커지고 건강해졌다. 태어난 아이의 영양 상태에 따라 신장과 몸무게가 증가했다.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남한 사람과 북한 사람의 신장 차이는 같은 유전자가 환경에 따라 얼마나 큰 차이를 보일 수 있는지 알려주는 대표적인 예다.
표현형의 변화와 함께 문명이 발전해온 과정에서 일어난 환경의 변화는 다시 인간의 모습에 영향을 미친다. 스포츠에서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 약물로 근육을 키우기도 하고, 바비 인형의 미적 기준에 맞춰 여성의 신체가 통제되기도 한다. 이러한 ‘설계자 표현형’에 따라 현재 많은 최상급 운동선수들이 스테로이드를 이용해 표현형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며, 여성들의 체중 감량에 쓰이는 약물의 역사 역시 유서 깊은 재앙에 가깝다. 이는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여서, IQ 테스트에 따라 아동을 분류하고 시험 성적에 따라 선별된 교육을 시키기도 한다. 영양 과다에 따른 비만은 이제 세계에 널리 퍼진 대표적인 ‘소비자 표현형’이다. 비만 유행은 여러 달갑잖은 결과를 가져왔지만 우리는 어느 때보다도 건강하게 오래 산다. 만성적 영양 과잉은 새로운 규범이 되었으며 우리는 여기에 적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자연선택에서 해방된 인류는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
그렇다면 미래는 어떨까? 환경의 변화에 따른 인간의 변화가 늘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것처럼, 미래에 관해 전망하는 사람들은 쉽게 부정적인 시각을 내놓기 마련이다. 기후 변화에 따른 생태 붕괴가 그중 하나이며, 오염의 누적에 따른 환경 위기 가능성도 크다고 이야기한다. 이에 반해 어떤 사람들은 무한한 경제 성장의 전망을 제시하며 유전공학과 전자 뇌 이식의 미래를 그린다. 에드윈 게일은 이에 대해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누구도 살고 싶어하지 않을 미래”라고 이야기한다. 그가 생각할 때 인류의 긍정적인 변화의 방향은 성장, 교육, 기회가 모두에게 고루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이 목표가 실패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약물이나 기술을 동원한 표현형 개조에만 지나치게 의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다른 미래 과학 서적들과 사뭇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은 자연선택이 결코 대비할 수 없었던 삶에 우리가 놀랍도록 훌륭히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해야 하며, 어려운 일이지만 앞으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뻔한 디스토피아도, 화려한 장밋빛 미래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나름의 문화를 지닌 인공적 존재이며 우리가 만든 세상에 적응하고 불확실한 미래를 받아들이려고 분투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자연적’ 존재 방식 같은 것은 없다. 우리는 과거의 성과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미래로 나아갈 것이며 그 미래는 끊임없이 우리의 예측을 비켜 갈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우리가 달라졌고 여전히 달라지고 있으며 이것이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해 중요한 무언가를 알려준다는 것이다. 『창조적 유전자』는 빠르게 변화하는 현시대에 인류가 나아갈 길을 비춰줄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