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만지지도 않고 볼 수 있다는 걸까?”
눈으로 보지 않는 언어학자의 ‘비주얼 세계’ 낯설게 보기
오래전부터 시각은 ‘가장 고귀한 감각’으로 여겨져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일상 속 물건들부터 공동체를 유지하는 제도들까지 모든 것이 ‘볼 수 있음’을 전제로 만들어지고 굴러간다. 이 책의 저자 호리코시 요시하루는 이런 불균형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보는 감각’을 인지하기 전인 두 살 무렵, 망막아세포종이 발병해 두 눈을 적출했기 때문이다(193쪽). 흔히 시각장애는 ‘빛을 잃고 어둠만 남은’ 상태로 묘사되는데, 애초 잃을 것이 없었던 저자에게는 빛도 어둠도 존재한 적이 없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장애를 결핍이 아니라 차이로 여긴다. 이 책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눈으로 보지 않는 부족’과 ‘눈으로 보는 부족’도 그런 맥락에서 쓰였다(22쪽).
어린 시절 “만지면 안 돼”라는 말을 듣고 만지지 않고 어떻게 봐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저자에게 시력은 오히려 ‘초능력’이다(21쪽). ‘손과 귀로 보는 게 당연한’ 그의 세상은 ‘눈으로 보는 부족’이 아는 세상과 전혀 다른 모습이다. 전철에 설치된 잠금기능이 없는 화장실이나(31쪽), 요즘 앞다퉈 도입 중인 터치스크린 기계(93쪽) 등 ‘보는 사람’을 전제로 한 시설들은 시각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회를 문제 삼기보다는 개인의 시각능력을 평가하게 만든다. 저자조차 시각 중심의 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롭진 않다. ‘보다’와 ‘읽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쓰는 습관에 대해 ‘지적’받은 후, 그는 시각이 사회 전체에서 인식과 소통의 중요한 메타포가 되어 있음을 깨닫는다(53쪽).
앞으로 기술이 발달해 시각장애인도 시각정보에 접근한다면 이런 문제가 사라질까? 저자는 점자 문자를 비롯한 고유의 ‘맹인력’이 사라지는 것이 쓸쓸하다고 말한다. ‘보지 않는 것’이 결핍이 아니라면 ‘보지 않는 문화’ 역시 결핍이 될 수 없으므로. 이 책을 옮긴 노수경 번역가는 시각장애인인 저자가 목소리로 쓴 책임을 깨닫고 뒤늦게 오디오북을 참고했다고 한다(283쪽). 이 책은 ‘번역’이 아니라 ‘통역’의 작업이었다는 그의 말은, 책은 눈으로 읽고 손으로 쓰는 것이라는 생각조차 시각에 기준을 둔 생각임을 알려준다. 실제로 책을 점자로 읽는 저자는 읽기 힘든 문장이 나오면 눈이 아니라 ‘손가락에 거슬린다’고 표현한다(11쪽). 당연하고 익숙한 일상을 이처럼 낯설게 만드는 것 또한 저자가 이 책을 쓴 의도였을 것이다.
“안 보이니 어쩔 수 없겠네.” “무슨! 보여도 어쩔 수가 없잖아.”
‘답답한 경계를 세게 무너뜨리는’ 선생님의 거침없고 유쾌한 일상
장애를 지닌 학생들이 흔히 공부하는 사회복지학, 특수교육학, 장애학에 저자가 몸담지 않은 것은 언어학을 좋아해서이기도 했지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고 싶었던 이유도 컸다고 한다(47쪽). 그가 공부를 마치고 강단에서 ‘눈으로 보는 부족’들을 마주하는 모습은 여느 선생님들과 비슷하다. 수업에서 학생이 잡지를 읽고 있으면 빼앗기도 하고, 딴짓하는 학생에게 나가라고 소리지르기도 한다(24쪽). 점자는 어째서 그런 식으로 쓰느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에 “몰라, 그렇다면 그런 거야”라고 짜증 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을 때도 있다(132쪽).
책에 따르면 장애인들이 길에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놀랍게도 “어디 가니?”이다(106쪽). 환갑을 목전에 둔 저자는 지금도 이런 황당한 질문을 자주 받는다고 한다. 그래서 호의를 제공한답시고 “내가 데려다줄까?” 하며 접근해오는 사람들에게 “그러냐, 고맙구나”라고 똑같이 반말로 대꾸해준다. 병원에서는 아내를 통해 자꾸 문진하는 의사에게 “저에게 물어보세요!”라고 발끈하기도 한다(108쪽).
이 책은 장애인 배려의 만능키로 여겨지는 ‘배리어프리(barrier free, 사회적 약자들의 생활에 지장을 주는 물리적·심리적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 정책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한다. 저자는 전철역 계단 손잡이의 점자 표시 기능에 여전히 문제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는 일과 별개로, 이러한 배리어프리 정책이 엉뚱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열차로 통근하는 저자가 환승 시간이 짧고 배차 간격이 긴 역에서 서두르고 싶은데도 자신을 ‘보호’하려는 역무원에게 제지당했던 경험, 다른 승객들과 달리 10분 전부터 준비하도록 채근당한 일화를 소개하며, 융통성 없는 배리어프리를 마주할 때의 난처함을 토로한다(99쪽). 물론 ‘배리어프리’가 이제야 확산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는 이런 ‘솔직한’ 논의가 아직 이를 수도 있다. 일본은 100년 이상 된 점자신문이 있을 만큼 인식과 제도가 한국보다 앞서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소통이라는 알맹이가 없는 기계적 배리어프리가 허울에 불과할 수 있다는 지적(100쪽)은 오늘날 한국 사회도 귀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눈으로 보는 부족’이 그간 ‘눈으로 보지 않는 부족’에 대해 넘겨짚어온 것을 깨뜨리는 에피소드들은 ‘배려’와 ‘보호’의 대상으로만 그려지던 장애인의 일상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당사자들이 들려주는 이런 평범한 이야기들이 늘어날수록 장애인과 비장애인 사이의 장벽도 조금씩 낮아질 수 있을 것이다.
“장애인을 쫓아내는 사회는 약하며, 무너지기 쉽다.”
‘발목 잡기’라는 오래된 논리에 대하여
일본은 장애인 정책이 한국보다 앞서 있긴 하지만, 장애인이 비장애인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의 논리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 책에서는 2016년 일본의 한 장애인 시설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이 여러 차례 언급된다. 저자에 따르면 가해자가 범행동기로 밝힌 “장애인은 죽는 편이 모두에게 이익이다”라는 말에 깔린 무시무시한 ‘논리’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회 곳곳에 퍼져 있다(249쪽). 공교롭게도 일본에서 오랫동안 시각장애인 라디오 프로그램을 담당했던 한 연출자가 “시각장애인이 한 사람도 남지 않게 되면 좋겠다”는 ‘선한’ 소회를 밝힌 적이 있는데(114쪽), 그는 여기서도 ‘발목 잡기’ 논리의 끈질긴 그림자를 감지한다.
소수자를 위한 기술의 발전을 저자가 마냥 달갑게만 느끼지 못하는 것은, ‘효율성’에 방해되지 않도록 장애인은 ‘배려’나 받으며 ‘분수’에 맞게 머무르라고 요구하는 듯해서다(120쪽). 그는 유엔의 〈장애인 권리협약〉에 나오는 ‘합리적 배려’ 개념이 배려를 하는 쪽과 받는 쪽의 권력관계를 은연중에 전제하므로 ‘적당한 안배’라는 용어로 바꾸자고도 제안한다(73쪽).
한국에서도 장애인 이동권 보장 시위가 벌어질 때 반대 의견의 근거로 등장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논리에 대해, 저자는 공리주의가 그 자체로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모두가 양보하면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과정일 뿐이라고 강조한다(118쪽). 시각장애인으로서 그가 일본 사회를 보는 방식은, 장애 관련 이슈가 찬반 논의의 영역으로 넘어가며 갈등이 고착화된 한국 사회도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