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과 형식의 새로운 조합으로 2333년의 미래에서 보내는 오징어 박사의 메시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은 지구를 오직 자신들만의 터전이라 여기며 다른 생명체들에게 이기적이고 야만적인 행태를 보여 온 인류를 단 13초만에 멸종시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신체적 고통은 물론 스스로의 죽음도 인지하기 전에 지구에서 멸종된 인간이라니! 드넓은 우주를 품에 안고 경계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며 시각적으로도 온전하게 그 이미지를 구현해내는 조수진 작가의 창작 세계와 지구환경에 대한 메시지가 이 책을 통해 재미있게 발화됐다.
코스모빌라 외관과 내부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스크롤 타입의 접이책 형식과 야광으로 나타나는 멸종동물
책은 글과 이미지만이 아니라, 물성을 통해서 내용을 확장하고 심화시키도 하는데, 『2053년 이후, 그 행성 이야기』는 그 부분을 잘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표지를 펼치면 ‘코스모빌라’ 팻말과 함께 8층의 외관이, 바로 아래에는 8층의 실내 모습이 동시에 보인다. 페이지를 아래로 한 번 더 펼치면 7층의 외관과 7층의 실내가 함께 보이며, 이런 순서로 1층까지 이어진다. 전체를 다 펼치면 1965mm 길이로 8층의 코스모빌라가 드러나는 구조의 이 책은 벽걸이로 어둠 속에 있을 때 작가의 완전한 의도가 드러난다. 빛 속에서 컬러 이미지로는 코스모빌라에 살고 있는 새로운 종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불을 끄면 ‘코스모빌라’ 팻말이 ‘멸종의 역사’로 바뀌며 이 세상에 존재했지만 멸종된 동물, 그리고 인간을 포함한 멸종 위기의 동물들이 야광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에 존재했지만 현재는 볼 수 없다는 멸종동물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완벽하게 전달하는 장치로, 작가가 말하고자 한 멸종의 역사와 위기를 한눈에 보여준다.
별책, ‘오징어 박사의 연구 노트’는 이 책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로 역할
본책에서 특별한 형식으로 멸종의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보여주었다면, 책 속의 책인 별책 ‘오징어 박사의 연구 노트’에서는 등장인물과 배경을 촘촘하게 연결시켜 빈틈없는 세계관으로 지구환경의 위기와 중요성을 설파한다. #우주평화단, #2053년, $2333년, #제3태양계, #오징어박사 등 픽션의 요소들과 멸종동물의 역사인 논픽션을 씨실과 날실로 직조해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가는 과정에서 한 올의 어긋남도 없이 매끄럽게 이어지는 서사는 감탄을 자아내며 책에 몰입하게 만든다. 인물의 성격 형성 부분으로 그 예를 들면 코스모빌라에서 소개되는 402호의 멜로미스 씨는 골디락스 영역의 우주보안관으로 해마다 온도가 오르는 것에 대해 걱정한다. 이를 관찰하는 오징어 박사는 그의 연구 노트에서 멜로미스 씨가 우주보안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기온과 날씨를 포함한 모든 변화를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자신의 모습을 멜로미스 씨에게 투영해 동질감을 느낀다. 실제 브램블케이멜로미스는 2016년에 멸종되었는데, 그 원인은 이상기후로 인한 해수 온도 상승으로 서식지가 없어져 떼죽음을 당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멸종동물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오징어 박사의 연구 노트’ 참고자료 부분에 실려 있다. 인물 하나에 대한 연결고리가 이러하다면, 책 전반에 대한 연결고리가 담긴 세계관은 이 책의 중심인물인 오징어 박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오징어 박사의 연구 노트’ 마지막 페이지가 특히 인상적이다.
이 내용은 ‘지구 생명체 복원과 리셋된 지구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종의 연구’를 목적으로 탄생된 실험체들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지구의 언어로 기록되었으며, 특히 인간을 학습시키기에 가장 효율적인 매체였던 ‘책’의 형태로 만들어질 것이다.
매혹적인 이미지로 구현된 새로운 생명체, 판타지에 구체성을 더하다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내용 구성만이 아니라, 시각 언어를 통해서도 완벽하고도 매력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초점이 흐려 몽환적으로 보이면서도 빈티지의 친근함을 풍기는 이 책의 이미지는 15~ 18세기 드로잉에서 고판화 느낌의 선을 추출하는 것으로 시작해 드로잉과 페인팅, 디지털드로잉 등으로 일차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리소그라피로 출력한 다음, 이들을 다시 디지털에서 편집하는 기법을 이용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미술 표현을 통해 경험해보지 않은 기묘한 세계를 자신만의 작품 세계로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끌어내어 하나의 미래 종족을 탄생시킨 작가에게 진정한 크리에이터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