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하고 다양한 시의 목록
무뎌졌던 눈을 뜨게 하는 시 읽기
정은귀는 시를 통해 나와 타인, 사회 곳곳을 세심하게 바라본다. 그의 시선이 특히 향하는 곳은, 권력이나 명성으로 빛나는 곳이 아니다.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자리다. 정은귀는 김소연의 시 「학살의 일부 1」을 읽으며 미래에 대해 자신에게 상담하러 왔던 학생을 떠올린다. PD가 되겠다는 꿈이 있었지만 언론사의 해직 사태를 보며 꿈을 접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학생을 보며,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개인의 문제를 절감한다. 청년이 꿈을 꾸기 어렵게 만드는 사회의 모순에 가슴 아파하는 동시에, 일상 속 비극에서 무려 ‘학살’의 조짐을 느낀 김소연 시인의 혜안을 짚어낸다. 우리는 모두 연결된 존재이기에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에는 저마다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쉼보르스카의 「경이로움」을 읽으면서는 삶의 어느 시절 골몰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한번 꺼내온다. 수많은 생명 중 단 한 명으로 존재하는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며, 삶의 모든 순간은 경이롭고 소중하다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이 책에서 언급한 현대 미국 시인들의 면면도 다채로운데, 저자가 직접 한국어판 시집을 번역한 루이즈 글릭,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에 대한 이야기뿐 아니라 로버트 하스, 줄리아 달링, 마리 하우 등 한국 독자에게는 아직 낯선 시인의 이름도 눈에 띈다. 로버트 하스의 「판문점, DMZ를 다녀와서」는 시인이 2017년 서울에 왔을 때 국제문학포럼에서 읽은 시로, 외국인의 눈으로 본 한국전쟁의 참상이 건조하게 쓰여 있는데, 이는 한국전쟁을 먼 과거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던 한국 독자들의 의식을 건드린다. 2020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루이즈 글릭의 경우, 정은귀가 지금까지 그의 시집 일곱 권을 번역했으며 앞으로 여섯 권을 더 번역할 예정이다. 정은귀는 글릭의 시 「꽃양귀비」에 대해 이야기하며, 기도하는 영성의 자세를 보이기도 한다. 정은귀가 이야기하는 사랑은 많은 부분 영성에서 비롯되며, 특히 팬데믹이 한창이던 시절 미국에서 안식학기를 보내며 써 내려간 글들은 재난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사회와 관계에 대한 성찰과 이어진다.
지금-여기를 살아가게 하는 시의 힘
시를 읽으며 나와 타인의 마음을 응시하는 정은귀의 시선은, 존재의 소중함에 대한 자각을 품고 나와 타인을 넘나들며 서로를 키워내는 ‘사랑’에 이른다. 서로 연결되어 돌보는 존재로서, ‘품고 안기는’ 관계 속에서 새로운 눈을 뜨고 오늘 하루를 견디는 힘을 얻는다고 이야기한다. 시를 읽으면서 늘 ‘지금-여기’를 살아간다고 말하는 그는, 시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길은 시의 문장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고 타인과의 연결을 모색하는 부지런함이 곧 사랑인 것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추천사를 통해 “인간의 아픔을 근심하고 세상의 건강을 바라는 간절함의 깊이”가 엄숙할 정도로 다정하다고 썼다. 팬데믹이 지나가고 연결과 연대를 생각하는 시대, 시의 힘을 믿는 정은귀의 문장을 통해 나와 타인을 애틋하게 바라보고 사회의 모순은 단호하게 성찰하는 시선을 길러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