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만주국 민중의 삶과 만주국 ‘로컬리티’
『만주국 시기 중국소설』에 수록된 작품들은 당시 만주국 민중이 겪어야 했던 고단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여러 세대를 거치며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왔던 만주 지역의 민중들은 일제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착취로 인해 고통을 겪었고 더러는 삶의 터전을 잃고 유랑한다. 오랫동안 만주 지역을 지배한 지주제와 새로이 유입된 식민자본은 만주국 농촌 사회의 급속한 파탄을 초래했다.
산딩(山丁), 구딩(古丁), 왕추잉(王秋螢)의 작품에는 경제적 계층 질서가 고착화된 만주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평생 가난과 기아에서 벗어날 수 없는 농민의 처참한 현실과 불평등한 사회 구조가 묘사된다. 물론 이러한 고통이 비단 농민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샤오쑹(小松)의 작품에서 볼 수 있듯, 동부 접경지대에 살던 이들은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나들며 밀수를 감행하기도 한다.
만주국 작가들은 이처럼 민중들의 험난한 생존 현실을 밀도 있게 묘사한다. 위기가 일상이 된 만주국 현장에는 둥베이(東北) 민중의 비애, 고독, 그리고 그들에 대한 깊은 동정과 연민이 배어있다. 만주의 흑토(黑土) 깊숙이 축적된 그와 같은 고난의 기억들은 광활한 초원과 원시림을 배경으로 만주국 문학의 ‘로컬리티’로 승화된다.
▶ ‘낮은 하늘 아래, 좁은 길을 걷다’, 만주국 여성의 신산(辛酸)한 삶
『만주국 시기 중국소설』은 만주국 여성작가의 작품을 여러 편 소개한다. 만주국 여성작가의 창작은 만주국 사회 내부에서 줄곧 억압의 대상이었던 여성들의 현실을 폭로하는 동시에 만주국 사회가 지니는 구조적 모순을 여성의 시각에서 그려낸다. 무엇보다 이들은 여성작가 특유의 섬세한 안목으로 주변화된 타자들, 즉 여성, 아이들, 하층민의 일상 속에 스며든 ‘폭력’을 예민하게 포착한다.
만주국 문단에서 활발한 창작을 전개했던 우잉(吳瑛)과 단디(但娣)의 작품은 여성과 사회 빈곤층의 비참한 생활상을 묘사한다. 그녀들은 만주국 사회의 기형적 심리를 비판하는 동시에 민족적, 계급적, 젠더적 경계에 조심스럽지만 민감하게 접근한다. 또한 만주국은 물론 화베이(華北) 지역까지도 유명세를 떨친 메이냥(梅娘)은 여성 화자의 독특한 자의식을 통해 식민 공간을 횡단하여 코스모폴리탄적 시선으로 식민지 근대성의 경계를 탐색한다.
▶ 만주국의 다층적 풍경과 역동성, 그리고 삶의 면면
『만주국 시기 중국소설』은 만주국의 문화적 역동성을 드러내는 다채로운 삶들을 조망한다. 다양한 국적과 계층의 사람들로 이루어진 만주국은 전통과 근대, 제국과 식민지 사이에서 문화적 ‘혼종성’을 형성하였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조선을 거쳐 만주로, 다시 만주에서 러시아로 연결되었던 ‘만철(滿鐵)’은 단순히 철도 노선의 확장을 넘어 인터내셔널한 문화적 ‘월경(越境)’을 가능케 했다.
만주국에서 문화적 ‘혼종성’을 흥미롭게 드러냈던 공간은 이른바 ‘동방의 모스크바’로 불리던 국제도시 하얼빈이다. 대도시의 향락과 타락, 제국의 번성과 쇠퇴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던 하얼빈은 만주국 작가들에게 식민지 근대 문명의 체험과 상상을 가능케 한 공간이었다. 중국의 ‘앙드레 지드’로 일컬어졌던 줴칭(爵青)이나 만주국의 대표적 진보 작가 관모난(關沫南)은 하얼빈이 지닌 근대 문명의 한계와 가능성을 예리한 시각으로 포착한다.
작품에 묘사된 조선인, 유대인, 러시아인 등 다양한 민족 출신의 유랑민 형상과 실향 정서는 만주국의 ‘혼종성’을 드러내는 흥미로운 소재이다. 만주국 작가들은 조국을 떠나 방황하는 유랑민의 설움에 공감하며 전쟁의 실상을 폭로하는 동시에 실향민과 유랑민의 궤적을 추적하면서 만주국에 형성된 식민지 네트워크를 기록하고 있다.
▶ 만주국 작가들과 식민지 문단의 궤적
만주국에서 활동한 작가들은 혼란했던 식민지 현실을 정면으로 묘사하거나 그에 대한 저항의 소리를 내기 어려웠지만,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만주국 문단의 맥을 이어간다. 1930년대 만주국 작가들은 『명명(明明)』, 『예문지(藝文志)』 같은 잡지를 진지(陣地)로 삼아 창작 활동을 전개한다. 이 시기에는 만주국 문학의 ‘방향성’에 대한 첨예한 논쟁이 발생하기도 했는데, 산딩과 왕추잉은 만주국 사회의 현실을 폭로하는 ‘향토문예(鄕土文藝)’를, 구딩과 줴칭은 척박한 만주국 문단에 다양하고 풍성한 문예 실험과 창작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사인주의(寫印主義)’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두 진영의 주장과 별도로 그들의 창작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드러낸다.
이 책에는 ‘예문지도요강(藝文指導要綱)’을 통해 본격적으로 작가들의 활동을 통제한 1941년 이후 발표된 작품이 포함되어 있다. 그와 같은 강압적 문예 정책이 실행되자 다수의 작가들은 일제의 감시와 억압을 피해 만주국을 떠나게 된다. 이 책에 번역된 작품들은 만주국 작가들이 어려운 창작 환경과 척박한 현실 속에서도 자신들의 경계적 정체성을 글쓰기라는 형식으로 고민하고 사유했음을 확인하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