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체코-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중동부 유럽 5개국
유럽과 시선을 마주하며 오롯한 속도로 걷는 도시 산책
유럽 여행에서의 처음 며칠은 보이는 건물, 거리, 사람, 풍경, 예술 작품마다 눈을 뗄 수 없이 신기해서 감탄이 나온다. 허나 이름만 바꿔 펼쳐진 듯한 광장, 언어만 바꿔서 건네준 듯한 식당의 메뉴판, 다른 박물관에서 본 듯한 그림 등 새로움도 며칠뿐, 이내 관심을 잃고 만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여행 책자를 뒤적이고 공부를 해봤지만 막상 여행 중 만나는 유럽 도시의 풍경은 비슷비슷하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걸까?
유럽은 같은 가톨릭 문화권이 통치해온 왕조가 겹치는 터라 서로 경쟁하며 주고받은 역사가 깊다. 그래서 고유의 문화와 언어를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종교, 정치, 외교적으로 경계하거나 협력하고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면서 서로 밀접하게 영향을 받았으니 어찌 보면 고만고만해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이 책의 저자, 권용진은 홈볼트 대학교 교환학생으로 베를린에 머물면서 서로 국경을 접하는 중동부 유럽 5개국(폴란드-체코-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 주요 도시가 품고 있는 역사와 시사 지식에 자신의 관심사인 정치ㆍ외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까지 이 책에 담았다. 여행 중에 떠오르는 무수한 물음표에 그냥 발걸음을 돌리지 않고, 꾸준한 지적 탐구심으로 도시가 품고 있는 맥락을 읽고 감정을 해석했다. 관심 갖고 머물지 않으면 잘 볼 수 없는 오래된 도시가 건네는 말들을 들어보자.
‘도시×역사×시사×배움’
당장은 쓸데없을지라도 알고 나면 의미 있는
지적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유럽 인문 여행
17세기 중반 영국을 중심으로 명문가 자제들은 성년이 되기 전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혔다. 이것이 현대에 여행의 개념을 세우게 된 ‘그랜드 투어’이다. 그랜드 투어는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을 넘어서 ‘보아야 알게 되는’ 여행 방법이다. 연륜과 경험이 많지 않아도 이 책의 여정을 따라 유럽에 시선을 둔다면 누구나 지적 탐방을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을 감상하고 자연 경치를 즐기는 여행도 좋지만, 책상 밖을 탐구하는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은 어떤가. 탐구심은 여행할 때 배부르게 해주진 않지만 배고픔을 참게 해줄 순 있다. 지적 여행은 뱃속이 아니라 마음속을 채워준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고 하지만 ‘보아야 알게 되는’ 것도 분명 있다.
이 책은 5개국 주요 도시에 얽힌 역사와 시사를 이해하기 쉽게 유럽사의 주요 인물과 사건, 구조적 배경 등과 연관 지어 흥미롭게 풀어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폴란드 오시비엥침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선 ‘악의 평범성’을,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에선 민주주의에서 광장의 역할을, 무너진 베를린 장벽에선 자유를 향한 몸짓을, 뮌헨에선 반성으로 꽃피운 민주주의를, 빈에서는 황제와 제국주의 역사를, 부다페스트에서는 유럽의 미래를 떠올리며 사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거듭되는 영광과 몰락,
파괴와 폐허의 흔적에서 벗어나 공존으로
오래된 도시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
이 책에서 소개하는 폴란드-체코-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요 도시는 중세 시대부터 냉전 시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 민족, 전쟁, 이념에 피 흘리고 경쟁하여 살아남았다. 그로 인해 새겨진 영광과 몰락, 상처와 흔적은 도시 곳곳의 풍경이 되었고 전혀 다른 언어, 문화, 제도, 공간, 인물은 도시의 기억이 되었다.
1부, 2부, 5부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 굴곡진 역사를 가슴에 묻은 다시 일어서려는 폴란드, 체코, 헝가리의 이야기를 담았다. 3부에서는 눈부신 발전에도 죄악과 죄의식, 파괴와 폐허를 함께 안고 있는 독일이 공존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발견했다. 4부에서는 도시 전체에서 묻어난 옛 제국의 영광과 상처에도 꿋꿋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오스트리아를 이야기한다.
인문 수업을 듣는 학생의 눈높이로 쓴 이 여행기는 오래된 유럽 도시의 새로운 발견이면서 한국 사회에 관한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유럽 여행을 꿈꾸며 계획을 세우거나 유럽을 추억할 때 이 책은 꽤나 유익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