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을 하면서 저자는 철학에서 그 답을 찾고자 애쓰고 있다. 저자 역시 괴롭고 답답한 현실을 살면서 철학으로 큰 위안을 받았다고 밝힌다. 부디 철학을 어렵고 딱딱하게만 생각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청소년들이 진로나 인간관계 등에서 느끼는 고통과 답답함이 사실은 지금 오직 나만의 것이 아니라 매우 보편적인 삶의 고민임을 설명하고자 노력했다. 어찌 보면 상처를 입고, 아파하는 과정은 삶에서 당연하며, 그 속에서 철학이 우리를 어떻게 보듬어주고, 또 어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지 다정하게 설명하고자 애썼다. 동시에 삶에 대한 여러 질문들도대체 나는 왜 태어났는지, 돈이 세상의 전부가 아닌지 등등의 답을 찾는 데 철학이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철학자들의 생각을 풀어내 설명하고자 한다.
청소년들은 밤마다 새벽마다 참 많은 카톡을 보냈다. “이상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등등. 지나친 입시 경쟁에 의한 불안, 열등감을 내면화하고 좌절, 우울, 무기력 등 불행의 감수성을 너무 빨리 배우는 우리 청소년들. 유독 왜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행복을 배워본 적도, 가져본 적도 없는 걸까? 그동안 ‘경쟁’이나 ‘성공’이 주로 추구했던 가치라면, 이제는 ‘생명’, ‘생태’, ‘환경’, ‘안전’, ‘복지’로 가치의 무게 중심을 바꿔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교육도 이제는 입시 경쟁만이 아닌 생태교육, 정치교육, 인문교육 등이 확대되어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지, 진짜 행복을 찾을 수 있는지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저자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로 인해 결국 청소년들이 적어도 경쟁이 초래한 ‘자살’ 충동으로 새벽마다 상담사에게 카톡을 보내는 일이 다시는 없기를, 저자는 간절히 바라고 있다.
“그 새벽, 혼자서 주저앉아 울면서도, 차마 모든 것들에게서 도망칠 수 없어 카톡을 보냈던 그 친구들은 사실 자신의 삶을 어떻게라도 붙잡으려던 거지요. 내 생에 대해 의문을 구하고, 계속 묻고 또 묻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 인생을 사랑한다는 증거니까요. 삶을 다시 붙잡는다는 건 말도 못할 고통이거든요. 그래서 삶과 우울은 함께 가는 거예요.”
샘, 저는 도대체 왜 태어났을까요? 공부도 못하고 아무 쓸모가 없어요.
…의자는 만들어질 때 목적이 있었어요. 그 목적이 의자에게는 본질이에요. 사물은 대부분 그럴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인간은 어떤가요? 무슨 ‘목적’이 있어서, 어떤 ‘이유’가 있어서 태어났나요? 그저 태어났어요. 아무런 이유 없이, 목적 없이 수많은 갈림길에서 무수한 마주침 끝에 기적적으로 태어났단 말이죠. 그리고 아기의 형태로 세상에 던져졌어요. 그래서 인간은 본질이 없어요. 무슨 기여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죠. 다시 말해서 친구들이 학교 공부를 잘해서 학교나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 뜻이죠. 그래서 인간은 ‘실존’이에요. 내가 태어난 이유를 내가 스스로 살아가면서 만드는 거죠. 이미 만들어진 이유 같은 건 결코 없어요.
‘나에게 주어진 목적’, ‘사회가 정한 꿈’이라는 바닷물은 그만 마시길 바랍니다. 그런 꿈을 찾는다고 바닷물을 계속 마시면 체화된 갈증은 결국 나를 잡아먹을 겁니다. 그럼에도 내 생을 다시 붙잡을 생수를 드세요. 그 생수가 샘한테는 철학이었는데, 누군가에게는 그림, 음악, 문학, 여행, 시, 길을 걷는 것, 춤, 모르는 것을 아는 짜릿함, 지켜 주고 싶은 사람, 누군가를 웃게 하는 일, 시들어가는 화초에 물을 주는 일일 수도 있어요. 이렇게 행복이라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나만의 확실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거예요. 모두가 원하는 보이지도 않는 보편적 행복이 결코 내 행복이 아니에요. 자기만의 이유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샘, 학교는 왜 다녀야 하는 거예요? 너무너무 지겨워요.
…국영수를 빠른 시간 안에 정해진 정답을 잘 찾는다고 내 삶에 던져지는 고민들,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을까요? 그저 빠른 시간 안에 답을 찾아야 하는 시험은 잘 보겠죠. 그러면 기업들이 사람을 거르는 커트라인 정도는 맞추겠죠. 그리고 스펙 쌓았다고 안심하고요. 그런데 이게 뭐에요. 그렇게 살면 되는 건가요? 우리 친구들은 그렇게 살려고 태어났어요? 정해진 정답만 잘 찾다가 죽는 사람으로요?
남들보다 느리다면 기꺼이 느리게 가세요. 경쟁은 사람을 동물의 왕국에 들어가게 해요. 우리가 무언가의 압박 속에서 참기 위해 이 아름다운 별에 온 건 결코 아닐 거예요. 왜 뛰는지도 모르고 일단 뛰면, 가다가 넘어지거나 갑자기 스스로 멈춰요. 순간 멍해지죠. 나 왜 뛰었지? 그리고 저릿해지고 주저앉게 되죠. 다시 못 일어나는 경우도 있어요. 그 순간, 천천히 걸었던 사람들이 미소를 머금은 채 지나가요. 주저앉은 사람을 추월해 가는 거죠.
샘, 엄마 아빠랑 말하기도 싫어요. 숨만 막혀요. 대화도 안 통하고, 부담만 줘요.
…사춘기는 모두에게 필수라고 생각해요. 오히려 사춘기가 있는 게 건강한 거죠. 이유 없이 짜증나고, 이 세계가 그냥 싫고, 부모는 나에게 강요만 하는 것 같고 말이죠. 이런 생각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에요. 루소도 이런 시기를 ‘제2의 탄생’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라캉 말대로 ‘미숙아’로 태어났거든요. 다른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걷고 뛰기도 하는데 인간은 몇 년 동안 밥도 혼자 못 먹어요. 그런 미숙아를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게 지금 여러분의 부모님이에요. 비록 지나친 기대가 힘들게 했지만, 지금 눈앞의 힘든 것 때문에 과거의 과정까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칸트 말처럼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죠. 부모님의 기대에서 자유롭고 주인으로 살고 싶다면 나를 기대하는 타인의 기대를 저버릴 용기도 필요하고 나만의 뜻을 정당화시킬 연습도 준비도 필요해요. 그래서 기꺼이 욕을 먹을 준비와 책임이 된 사람만이 주인으로 살 수 있다고 철학은 알려 주지요.
아는 사람 중에 부모님께 이런 말을 한 친구가 있어요. 지금까지 자기를 위해 사용한 영수증을 버리지 말아 달라고요. 그거 다 갚게 해달라고 말이죠. 가만히 눈을 감고 지금의 나를 나로 있게 해 준 모든 것들과 모든 사람들을 떠올려 보세요. 잘 생각해 보면, 참 이 세상에 빚진 게 많아요. 과연 내가 진 빚을 다 갚고 갈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이 문득 들죠. 내 존재가 누군가에게는 기쁨이었어요. 친구들 기억 속에는 없지만, 부모님들의 기억에 그런 순간들이 있지 않을까요.
샘, 저 진짜 죽고 싶어요.
…길을 잃었다고 나까지 잃지는 마세요. 프롬은 말했어요. 인생의 본질은 질문이라고요. 그래서 오늘도 자신의 삶을 끝내려 하는 친구들에게, 내 몸을 그어서라도 버티는 친구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세상에 대해 뭐 궁금한 것 없냐고요. 죽을 마음까지 들었다면 결코 그 마음이 가볍지 않았더라면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않느냐고 말이죠. 저는 또 질문합니다. 지금 보고 싶은 사람 있냐고요. 사실 나의 죽음은 그렇게 두렵지 않아요. 죽으면 나의 세계는 끝이니까요.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도 죽음에 대해 이런 말을 했죠.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오지 않고, 죽음이 오자마자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내가 죽고 나서 남겨진 사람들이 두려운 거지요. 제가 앞서 메멘토 모리에서 묘사한 것처럼 나의 죽음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남겨진 삶이 더 두려운 법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울을 달래줄 재료들은 제자리에 늘 있었어요. 붉으락푸르락했던 하늘도 재료가 될 수 있지요. 샘은 어느 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아, 나 너무 무겁게 살았구나…….’ 봄날에 공원 산책하듯 살다 가도 되는데 말이죠. 가벼운 돗자리 하나 메고 산책하듯이 살아도 돼요. 비 오고 난 뒤 무지개가 피고 지는 것처럼, 수려한 꽃이 바람결에 흩날려 피고 지듯이, 우리 같이 살아볼까요. 지금까지의 삶이 너무 가혹하다고 느껴져도, 처절하게 힘들고, 아프더라도, 잠시 숨고르기를 하고, 나만의 길을 다시 걸어가요. 삶에 있어 절대 실패라는 것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