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교육 12년 동안 함께한
혁신학교와 실천가들이 함께 써내려 온
2015년 봄날!
나의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놨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고 조심스럽고 불안하다. 나의 전문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심이 들고 자신이 없을 때가 많다.”
이런 나의 고민에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기억은 기록을 이기지 못한다. 전문성은 기록하고 성찰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생각한다. 너의 실천과 도전을 기록하라.”
이후 틈날 때마다 나의 생각과 행위를 모두 기록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만나면서 느낀 점, 떠오른 아이디어 등을 여기저기 손에 잡히는 대로 메모하고 기록했다. 어느 정도 메모가 쌓이면 글로 엮어서 저장했다. 이런저런 과정에서 쌓인 메모와 기록은 나의 장학사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 머릿속에서 번득이며 지나가는 생각들은 활자화되어 문서가 되었고 이는 교사들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생겼다. ‘창의성과 아이디어가 뛰어난 장학사’라는 타이틀이었다. 살짝 웃음이 나왔다. 내가 가진 창의성과 번득이는 아이디어는 사람들과 나눈 이야기들을 메모하고 정리해서 필요한 아이디어를 조합한 것이 전부였다. 이런 기록의 습관은 어느새 ‘교육전문직’으로서 나의 전문성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도교육청으로 근무지를 옮긴 뒤, 지원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업무의 중압감이 나를 짓눌러왔다. 어떤 일이든 시작하기 전에는 수없이 많은 협의와 토론을 거쳐야 했다. 행정의 단위가 커짐에 따라 수반되는 민원과 외부의 견제에도 적응해야 했다. 법령에 근거한 논리, 철학에 기초한 논리를 기본으로 실천에 바탕을 둔 감화력도 가져야 했다. 그래서 생긴 버릇이 나와 우리 팀의 방향을 잘게 쪼개서 생각해보는 ‘분리사고’였다. 새로운 것을 시작할 때는 냉철한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고 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모든 학교를 대상으로 컨설팅하던 지원청과는 달리 혁신학교를 중심으로 좀 더 깊게 들여다보면서 혁신학교가 가진 어려움과 실천가들의 아우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희생하고 몸을 던져가면서 아이들과 함께 만들어낸 실천이 근거 없는 프레임과 억측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북의 혁신정책이 현장으로 확산되는 과정과 그에 따른 긍정적, 부정적 요소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다.
기록이 쌓일수록 보다 근본적인 혁신과 변화를 생각하게 되었다. 본질을 건드리지 못하고 변죽만 울리는 정책은 지속적인 혁신을 가져오기 어렵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학교라는 공간이 그 목적에 충실하도록 지원하는 일, 아이들에게 선생님들을 온전히 돌려주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 해답은 결국 교육과정에 있었고, 이는 초등교육과정 분야에서 돌파구를 찾아내는 결과로 이어져, 마침내 2022개정교육과정에 ‘학교자율시간’을 만들어내는 성과로 이어졌다.
현장과 소통하고 기록으로 남기려는 노력은 교육과정 정책의 변화로 귀결되었다. 2022 개정교육과정 ‘학교자율시간’은 오랫동안 교육과정 혁신을 실천하고 교사교육과정을 꿈꾸던 교사들의 실천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각 시도교육청과 시도교육감협의회, 국가교육회의 등 다양한 주체들의 공동노력으로 만들어졌다. 그 과정에 전북교육청 소속 혁신학교와 전주교육대학교 연구진들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현장에서 변화된 정책을 착근시키는 노력이 필요한 시점이다. 교사들이 일상적으로 자기 교과목을 만들어내고 공식적·제도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도록 전문성을 쌓아가는 노력을 지속해야 한다. 이런 노력 또한 교사들 각각의 기록에서 출발해야 한다. 기획의 단계부터 성찰에 이르기까지 자료를 모으고 생각을 정리해야 가능한 일이며, 이 과정에서 전문성을 발휘해야 한다.
장학사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업무매뉴얼과 사례에 충실한 사람, 법령과 규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그것이 전문성을 갖추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이 의견에 동의할 수 없었다. 문서에 적힌 대로 실행만 하는 것이 전문성의 전부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생각하는 전문성은 ‘실현하기 어려워 보이는 일이라도 노력을 통해서 실현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전문성은 기록과 성찰에서 비롯된다. 교육전문직으로서 나는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 부단히 실천하고 기록하고 성찰하며 성장했다. 작은 성과에 취해있을 때 죽비를 들어 나를 깨워준 이들도 학교와 교사들이었고, 감당할 수 없는 부담감에 흔들리던 나를 든든하게 붙잡아준 이들도 실천하는 교사들이었다. 2년 동안 함께했던 고창 선생님들, 4년 동안 마음을 함께해준 혁신학교 선생님들이 계셔서 성장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감사 말씀을 드린다.
이 글에 모든 혁신학교의 사례가 들어있지는 않다. 장학사 개인으로서 가졌던 지극히 개인적인 실천과 성찰의 결과에 불과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교육청의 많은 전문직원들이 국가시책을 분석하여 교육청 정책과 연결하며 학교와 교사들과 함께 구현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국가의 시책과 교육청의 정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현장의 요구에서 출발해야 하며 교육운동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이 책은 혁신학교와 혁신정책의 기록물 중 하나이다. 혁신교육 12년 동안 함께한 혁신학교와 실천가들이 함께 써내려 온 책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혁신정책은 호수 위에 떠 있는 백조의 모습과 같았다. 겉으로 보기에 고고하고 흔들리지 않은 듯 보이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치열하게 발버둥을 쳐야 하는 힘겨운 일이었다.
그동안 혁신학교에서 묵묵히 헌신하신 선생님들께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현장의 선생님들과 함께 고민하면서 성장하려는 의지를 가진 교육자(교원, 교육전문직원, 교육행정직원)들과 교육전문직이 되기 위해 준비하는 선생님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