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사이, 식구 사이, 사람들 사이에서 먹먹할 때,
가만히 소리 내어 읽으면 관계를 풀어 가는 길이 보입니다.
누가 내 말을
가만히 들어 주면 좋겠어요.
누가 내 마음을
천천히 물어봐 주면 좋겠어요.
- 관계를 풀어 가는 법 7, 가운데
"살아가면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게 무어냐고 물으면 "관계"라고 말하는 사람이 참으로 많아요." 시집의 1부는 〈관계를 풀어 가는 법〉 연작시입니다. 몇 년 전, 산골 농부 시인은 할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의 마음으로 가는 또 다른 문을 열었습니다. 서로 이기지 않으려고 애쓰는 아이들과 남의 말을 들어 주는 건 잘 하는 아이, 아들 노릇 처음이라고 아빠한테 조근조근 말하는 아이, 그리고 눈치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하는 아이. 관계를 잘 풀어 갈 수 있는 길이 보이는 어떤 모퉁이마다 시인의 눈길이 머무릅니다. 가만히 듣고, 천천히 묻는 동시 한 편 한 편이 엮여져서는 "아픈 몸을 거뜬하게" 할 만큼 마음을 보듬어 줍니다.
보슬비, 여우비, 억수비
시로 만나는 자연의 노래
비가 내린다
억수비가 억수로 내린다
우리 집 식구들 한가하다
개와 고양이도 한가하다
참새와 까치도 한가하다
논과 밭도 한가하다
산길과 들길도 한가하다
온 마을이 한가하다
할 일이 없어 심심하다
그냥 심심해서 좋다
- 억수비
비가 내립니다. 시골에도 도시에도 온갖 비가 내립니다. 하지만 어느 틈엔가 "보슬비, 여우비, 억수비, 도둑비, 소나기…" 이런 비의 이름들은 잊혀져 갑니다. 비를 그저 강수량으로만 잴 때, 자연은 우리 곁에서 훌쩍 뒤로 물러섭니다. 농사는 물 시중이라고도 합니다만, "사람이 백날 물 주는 것보다 / 비 한 번 내리는 게 더 낫다."는 말처럼 농부 시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비입니다. 시골 뿐만 아니라 도시에서도, 비가 쏟아지면 하루하루 생활이 바뀝니다. 기분도 바뀌고, 할 수 있는 일도 바뀝니다.
그러니까 비는 날마다 맞닥뜨리는 가장 큰 자연의 움직임인 셈입니다. "비" 시 연작을 쓴 시인은 추운 겨울 새들과 눈을 마주치고, 닭장의 닭들과 식구가 됩니다. "긴 겨울, 엄청난 추위에도 / 산밭에 양배추는 죽지 않았습니다."라며 봄을 맞이하고, 먹을 것을 남겨 두는 때까치의 마음을 헤아립니다. "시인이 농사를 짓고, 시골에서 살아온 만큼, 시에도 그 삶이 담겨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된 산골 농부,
온전히 아이의 마음으로
관계와 자연을 이야기하다.
아랫동네 물난리가 나가꼬
집이 물에 잠기고 논둑이 다 무너졌다카대.
이런 말 들으모 말이다
지은 죄도 없는데 와 이리 미안하노.
밤새 우리 동네 내린 비가
아랫동네로 흘러가서 생긴 일이다 아이가.
- 할머니 걱정거리
길거리 포장마차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똥오줌 마려울 때 어떻게 할까요?
“길옆에 세워 둔 짐차 뒤에서요.”
“하천에 내려가서요.”
“참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붕어빵을 팔고 있는 고은이가
“가까운 상가에 뛰어가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정답을 맞혔어요.
……
말줄임표 끝에
.
마침표도 찍지 못하고.
- 고은이
우리 동네에 내린 비 때문에, 아랫동네 물난리가 더 커지는 것을 걱정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붕어빵 장사하는 어머니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내는 고은이 마음에 작은 물결이 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어서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합니다. 관계를 풀어 가는 것도, 자연을 깊게 받아들이는 것도 어느 한 순간 힘을 내는 마음의 움직임으로부터 비롯됩니다. 할아버지가 된 산골 농부는 지난 6년 동안, 자신의 삶 속에서 이런 순간 순간들을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받아 적습니다. 놓치지 않고, 다시 들여다 볼 수 있게, 어린 손주와 친구처럼 이야기할 수 있게, 꾹꾹 눌러 썼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깊고도 단순하게 그려낸 그림.
《골목길 붕어빵》의 그림은 단순하고 따뜻한 선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화가는 늘 자연의 모습을 담아 내는 일에 온 마음을 다했습니다. 시인의 마음이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듯 이 책의 그림도 자연스러운 단순함에 닿아 있습니다. 마당 한 켠 맨드라미부터 산밭 양배추까지, 괭이와 호미를 든 일하는 사람의 모습에서, 억수비가 쏟아지는 한가한 풍경에 이르기까지, 평상에 앉은 할머니의 바지와 낡은 연장들까지 화가의 시선은 자세히 보고, 가까이 들여다 봅니다. 그러고나서 낱낱의 모양새가 고스란히 담긴 단순하고도 사랑스런 그림을 그려냅니다. 시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동안, 그림은 마음을 움직여 갑니다.
집에서 식구들과,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읽을 때,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동시집.
“좀 사납긴 하지. 그리고 때까치는 그냥 지들 먹고 싶은 만큼 먹고 남기는 거 아닌가?”
“이건 서정홍 할아버지가 너무 좋게만 생각하는 것 같아.”
혼자 읽기에도 좋지만, 여럿이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눌 때 더 빛나는 책들이 있습니다. 이 동시집 뒤에는 함께 시를 읽고 아이들이 나눈 이야기가 〈동시 읽고 와글와글〉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습니다. 아이들이 생각나는대로 나눈 이야기는 "시"라는 것이 정답을 찾아 가며 읽는 글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냅니다. 시인은 아이들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는 원고를 고치기도 합니다. 여럿이 모인다는 것은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시집을 혼자 읽을 때에 가만히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된다면, 함께 읽을 때에는 공감하고 위로하는 마음을 주고 받습니다. 동시를 읽고 생각을 이어 나가는 방향은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오갈 때 서로를 더 깊게 이해하고, 관계가 돈독해지고, 함께 지내는 즐거움을 느끼게 됩니다. 《골목길 붕어빵》은 집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교실에서 아이들과 같이 읽어 나갈 때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동시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