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에세이, 우화를 넘나드는 매혹적인 스토리텔링
책, 독서, 도서관의 역사를 다룬 책은 무수히 많다. 테크놀로지의 발전, 새로운 매체의 등장으로 책은 곧 사라질 것이라는 묵시록적 예언에 반박하는 책도 무수히 많다. 그러나 『갈대 속의 영원』은 단순한 역사책도 아니고, 책의 중요성에 대한 당위적인 주장도 아니다. 일찍이 『독서의 역사』 등으로 이 장르를 일군 대가 중 한 명인 알베르토 망겔이 언급하듯, 바예호는 “이야기꾼의 목소리”로 말하기를 선택한다. 이 천부적인 스토리텔러는 세계화를 꿈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비전부터 말(구전성)과 글(문자언어)의 싸움, 번역의 탄생, 복제와 상업화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루어진 책의 전파까지 무수한 에피소드를 넘나들며 잘 알려진 역사의 새로운 판본을 엮어낸다. 여기에 “모든 시대의 무국적자를 위한 종이의 나라”(318쪽)에서 비로소 존중을 맛본 왕따 어린이였던 저자의 경험, 서슬 퍼런 프랑코 정권 아래에서 『돈키호테』로 시작하지만 두 번째 장부터는 『자본론』이 접붙여진 책으로 금서를 읽었던 부모님의 기억이 겹쳐지며, 독자들 저마다가 간직해온 책과 나눈 이야기로 이끈다.
연구자일 뿐 아니라 ‘호메로스와 베르길리우스를 연상시킨다’는 평을 받은 독특한 소설들을 발표하고 유수의 예술가들과 협업해 그림책을 펴내고 있는 픽션 작가이기도 한 이레네 바예호는 책을 다룬 논픽션인 『갈대 속의 영원』에서도 ‘이야기’를 펼쳐내는 유려한 재능을 발휘한다. 가장 값진 것을 보관하는 상자에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담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뒤통수에 문신을 새겨 말 그대로 피부에 쓰인 비밀 문서를 운반한 고대의 전령, 수레에 책을 싣고 시장과 객줏집에 자리를 잡은 이동서점 상인들, 사서들의 아버지이자 최초로 분류법을 고안한 칼리마코스, ‘시민’에서 배제되었지만 말과 지식을 엮어낸 여성들 사포와 클레오불리나, 서점 장사를 통해 혁명 자금을 댄 마오쩌둥, 금서를 은밀히 필사해 보존한 이교도들 등, 고대 세계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신화적 인물과 이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이 책은 그야말로 한 편의 장대한 서사시다. 그리고 이 서사시에 담긴 모험은 그 어느 영웅의 일대기보다 다채롭고 짜릿한 독서 경험을 선사한다.
지식과 꿈과 저항을 보존해온 발명품,
그리고 그것을 지켜낸 사람들의 이야기
『갈대 속의 영원』은 무엇보다도 현재에 이르기까지 책을 고안하고 지켜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책은 지금껏 무수한 파괴에 맞서며 자리를 지켜왔다. 화재로부터, 홍수로부터, 분서갱유로부터, 검열로부터. 러시아의 시인 안나 아흐마토바의 열한 명의 친구들은 작가에게 생길지 모르는 불행에 대비해 작가가 쓰고 있던 『레퀴엠』을 모두 암기해뒀다. 그리스어 텍스트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에서까지 발견되며 교육과 문화의 기회가 전파되었음을 증명했다. 바예호는 이들이 지식과 사상과 이야기를 지켜냄으로써 우리가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주었음을, 정신적 영토의 경계를 확장해주었음을, 낯선 시대와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만들어주었음을 밝혀낸다.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 책이 그 어느 때보다 큰 위협에 처했다는 불안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레네 바예호는 “책은 숟가락, 망치, 바퀴, 가위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 한번 창조된 이후로 그보다 나은 게 등장하지 않았다.”(16쪽)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는 순진한 낭만주의나 낙관의 발로가 아니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책이 견뎌온 시간과 여정은 그 자체로 바예호의 단언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한다.
이 책은 말을 타고 달리며 책을 찾아 나선 왕의 사냥꾼들로 시작해, 말등에 책을 잔뜩 싣고 험준한 애팔래치아산맥을 누비는 여성들로 끝맺는다. 이 여성들은 왜 책을 짊어지고 깊은 산속으로 향했을까? 그 책들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우리는 『갈대 속의 영원』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비로소 이들의 이야기가 어떻게 기원전 3세기 고대인들의 야심과 연결되는지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은 망각에 맞서 이야기와 지식과 발명을 보존하고 저항과 꿈을 가능케 한 최고의 발명품에 바치는 찬가이며, 책 속에서 연결되는 경험을 해본 모든 독자들을 위한 사랑스러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