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고, 창조하고, 살아가는 새로운 방식에 대하여
여성이나 소수자 불평등이 구조적인 문제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젠더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의 여러 철학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엇보다 들뢰즈주의 페미니즘은 젠더 정치가 어떤 페미니즘 운동에서든 그 자체로서 목적이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젠더 정치에 휘둘리는 현실에서 들뢰즈주의 페미니즘이 지금, 여기, 우리에게 어떻게 사유의 깊이와 단단함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 이 책의 저자 한나 스타크의 논의를 따라가 보자.
1장 “사유”는 서양 역사에서 사유와 담론이 지닌 남성중심주의적 성격을 고찰하면서 페미니즘의 역사적 발생이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보편주의에 내재된 ‘배제’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지적한다. 나아가 계몽주의적 사유와 주체 모델에 대한 근본적 대안을 제시하는 들뢰즈의 사상이 페미니스트들에게 유용한 아군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2장 “되기”에서는 들뢰즈가 동일성(정체성)의 대안으로 제시한 ‘되기’ 개념이, 왜 관계 맺기의 새로운 방식을 산출하게 되는지, 그리고 생성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지 설명한다. 또 《천 개의 고원》의 열 번째 고원에서 중점적으로 논의하는 여성-되기, 아이-되기, 동물-되기, 식물-되기를 거쳐 기본입자-되기, 세포-되기, 분자-되기, 지각불가능하게-되기 등 되기의 연속체적 윤곽을 보여준다. 더불어 뤼스 이리가레, 앨리스 자딘, 로지 브라이도티 같은 페미니스트 학자들의 들뢰즈 작업에 관한 초기의 비판적 평가도 소개한다.
3장 “욕망”은 주로 《안티-오이디푸스》를 중심으로 정신분석학에 대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문제 제기와 생산으로서의 욕망과 무의식이란 새로운 이론을 설명하고, 특히 그들의 이론이 페미니즘의 주요 관심사 중 하나인 섹슈얼리티와 에로티시즘를 새롭게 사유하는 데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살펴본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을 결핍과 부재로 정의하는 정신분석학, 특히 욕망을 가족구조 안에 놓으면서 제한하고 있는 오이디푸스 삼각형을 비판하면서, 욕망의 분자적 특징과 사회적/역사적 성격을 강조한다.
4장 “신체”에서는 페미니즘 이론 안에서 차이의 문제를 다루는데, 이는 성별화된 신체나 성차의 문제에 주목하는 일이다. 들뢰즈는 서양철학의 주요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방편으로 신체를 재개념화하면서 데카르트의 정신/신체 이분법으로부터 신체의 중요성을 복원한다. 또 섹스와 젠더 개념에 대해 주디스 버틀러, 모이라 게이튼스, 엘리자베스 그로츠, 로지 브라이도티까지 계보적으로 설명하면서 섹스와 젠더는 임의로 연결되지 않으며 사회적·역사적 맥락에서 섹스와 젠더, 자연과 문화의 범주는 필연적으로 상호오염되어 있음을 밝힌다.
5장 “차이”는 들뢰즈의 주저라 할 수 있는 《차이와 반복》을 중심으로 그의 순수 차이 개념을 살펴본다. 나아가 차이의 철학이 여성이라는 정체성(동일성)을 기반으로 하는 정치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을 어떻게 해체하는지를 검토하고, 또 다양한 정체성 위치를 고려하는 교차적 페미니즘과의 관계를 살펴본다.
6장 “정치”에서는 들뢰즈의 작업이 정체성 정치에 제기하는 도전을 고려하면서 페미니즘 논쟁의 핵심 용어로서 ‘인정’(recognition)의 중요성을 고찰한다. 들뢰즈가 인정 패러다임에 대한 성공적 대안을 페미니즘 이론에 제공한다고 주장하면서, 차이에 집중한 페미니즘 이론에 대한 지각불가능성이라는 들뢰즈적 정치학의 풍부한 잠재력을 살펴본다.
들뢰즈의 철학은 근래 여러 갈래에서 언급되고 있는 신유물론적 페미니즘(new materialist feminism)으로 가는 첫 길목으로서도 유용하다. 신유물론적 페미니즘은 ‘신체성’에 대한 새로운 담론 생산을 통해 근대적 주체를 비판하고 반인간주의와 자연주의를 추구하며 비인간 행위자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안한다. 또 여‘성’을 특권화하지 않으면서도 여성이 지니는 특수한 저항적 위치성을 긍정한다. 이러한 신유물론적 페미니즘의 특성은 성을 이분법적으로 정의하지 않는 들뢰즈와 가타리 철학의 근간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책은 로지 브라이도티, 엘리자베스 그로츠, 카렌 바라드, 제인 베넷 등 들뢰즈 철학을 전유한 페미니스트는 물론이고 브뤼노 라투르의 영향을 받은 도나 해러웨이, 들뢰즈를 직접적으로 경유하지는 않았지만 과학·기후·환경의 관계를 ‘횡단-신체성’(transcorporeality)으로 개념화한 생태주의 페미니스트 스테이시 앨러이모, 또 종과 멸종의 문제를 재사유해 온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 등 신유물론적 페미니스트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