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적인 언어와 표현으로 진리를 탐구해보는 시간”
인간의 본질을 정신의학과 종교를 통해 들여다보다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 철학과 신학 역시 그렇다. 가까이하자니 낯설고 거리를 두자니 왠지 모르게 불안하다. 철학의 근본은 인류가 이해할 수 없는 무수한 현상과 사물의 기능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품는 일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대다수의 서적은 어려운 개념과 학문적 용어로 구성되어 있어 일반 사람들은 읽기가 어렵다. 명실상부한 정신의학자 이호영은 특유의 공감 능력을 발휘하여 보통의 사람들 역시 철학, 신학, 과학, 역사와 같은 깊은 지식을 만나볼 수 있는 묘책을 마련했다. 쉬운 언어와 상식적인 표현을 매개로 한 인문서를 펴낸 것이다.
《90세 정신과의사, 인간과 종교를 말하다》는 인간의 본질을 빈틈없이 해체한다. 타고난 생존력과 회복력을 시작으로 공포와 불안, 공격성, 이타성과 이기심 같은 인간을 이루고 있는 면면을 탐색한다. 특히 정신과의사로서 동성애자들을 치료했던 경험을 이야기하고 한국의 기독교 대부분에서 죄악시하는 동성애를 안타까워한다. 그러면서 동성애자들 역시 ‘이웃 사랑’ 계명에 나타나는 이웃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외에도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세상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고착되어 있는 종교가 나아가야 할 방향성도 제시한다. 모두의 언어로 학문적인 지식을 명료하게 풀어낸 이 책에는 아흔 생 끝에 깨달은 선생의 무수한 지혜와 가치가 살아 움직인다.
“종교는 끊임없는 질문이다”
학문으로서의 종교, 신앙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이성적이고 솔직한 사색
이 책을 이끄는 주된 목소리는 단연 작가의 회고와 사색이다. 이호영은 모태신앙의 크리스천이지만 동시에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에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던 교인이었다.
“근본주의 신앙으로 하나님의 절대성을 믿고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신도들을 보면 그 흔들리지 않는 신앙이 참 부럽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다. … 가장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은 종교의 신비 속에서 이해가 되지 않아 생기는 회의와 갈등을 합리화로 부정하는 변론들이다.” (244쪽)
하지만 선생은 “왜?”라는 의문을 품는 것으로 자신의 종교적 세계를 제한시키지 않았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이치에 맞지 않은 논증은 과감히 틀렸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종교와 예수를 절대적 존재가 아닌 공부하고 증명해야 할 학문적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90세 정신과의사, 인간과 종교를 말하다》에서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의식의 확장’과 ‘새로운 상상’의 근간이 되었다. 선생이 출생한 1930년대의 일제강점, 만연했던 가부장주의를 고려했을 때 저자가 피력하고 있는 사유는 오늘날의 어떤 현인보다 이성적이고 진화된 세계관이기 때문이다.
혐오와 차별로 병든 인류, 과거에 고착되어 있는 종교
혼란한 세상일수록 실천해야 할 “지속적인 공감과 사랑”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고민해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언행이 있다. 특정 사상, 편협한 가치관, 좁은 시야에 갇히지 않은 학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신뢰가 있다. 이호영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과거를 촘촘히 플래시백하며 그것을 토대로 학문적 지식을 넓히고, 성숙한 신앙인으로 성장해나갔던 자신의 삶을 이 책에 담았다.
“나는 하나님의 신성과 절대성을 믿지만, 이성적 사고를 바탕으로 신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인격체로 존재하는가? 하나님이 실체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으로 추상적인 것인가? 창조하신 자연과 그 법칙을 깨고 하나님이 다시 자연이나 인간사에 관여하시는가? 같은 물음으로 고민하는 것이 건전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242쪽)
《90세 정신과의사, 인간과 종교를 말하다》는 “하나의 소문화로 전락한 한국의 기독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하고자 하는 한 신앙인의 애정 어린 고백이다. 정신의학자가 보여줄 수 있는 인류에 대한 사랑이다. 저자는 진보적이고 철학가적인 면모를 책 곳곳에서 드러내지만 그것을 풀어낸 언어만큼은 가장 보편적이고 대중적이다. 오랜 세월 스스로에게 바라온 “새로운 전망”과 “의식의 확장”을 최대한 많은 독자들과 함께 느끼고자 했던 마음 때문이다. 그간 철학과 신학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이들에게, 인간의 본질을 쉽게 이해해보고자 하는 이들에게, 저자가 그토록 염원해온 과학과 인문학의 통섭을 함께 체험해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은 소중한 유산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