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탄생하는 곳
신성한 시간과 공간에서
이곳이 현대의 세상에 처음 알려진 건 1970년. 어느새 반세기가 훌쩍 지났다. 그러나 알다시피 반구대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긴 시간을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장마철이면 암각화를 다시 물로 가두는 사연댐의 사연은 제법 최근 이야기고, 반구대 유역의 지형이 완성되던 때의 자연과 기후 환경이나 대곡천 바닥에 무수히 찍혀 있는 공룡 발자국들까지 언급하다보면 이야기의 시간은 어느덧 백악기 무렵에 닿는다. 무엇보다 반구대에 암각화를 새기던 옛사람들의 시절 또한 까마득해서 여전히 선사(先史)의 영역이라 부르는 곳이다(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다양한 발굴의 결과로 이 시기에 대한 인간의 인식은 확장되었겠지만, 아직은 상상력까지도 넉넉하게 품어줄 수 있는 공간이다.
저자의 이야기가 풀려나오는 곳은 그래서 다가서기 어렵고 위험했으며, 쉽게 잊히기도 했지만, 언제고 다시 발견되어 우리를 맞을 수 있던 곳, 바로 반구대다. 저자는 이곳이야말로 옛사람들에게 신성한 공간이었을 거라며, 이렇게 운을 뗀다. “반구대 바위에 사람이 찾아오는 동안 이곳은 신성한 공간의 중심이었다. 물길로는 바깥 세계와 이어질 수 있지만, 깊은 산의 골짝 길로 다가서기에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린 까닭에 가까이 가기 어려웠다. 물길로도 어렵게 닿았기에 사람들이 신과 만날 수 있다고 믿었던 반구대 암각화 바위. 잊혔다가도 다시 발견되고, 다시 찾을 수 있었던 신성한 바위에 찾는 이들이 신과 나눈 대화, 기도가 그림으로 남겨진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네 번의 새김, 여러 겹의 기억
그리고 스토리텔링
무엇보다 이 책은 암각화, 그 형상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인 반구대 바위 위 350여 개의 물상들은 새겨진 시기도 새긴 사람도 다르다. 새긴 사람의 생활 방식과 관념 세계도 같지 않다. 저자는 말한다. “반구대 암각화는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완성된 집단 창작품이다. 서로 다른 시각과 창작 방식이 교차하며 버무려진 작품이기도 하다.”
저자는 시간 순으로 크게 네 차례에 걸쳐 암각화를 새겨나간 이들의 자취와 그 창작된 무늬들을 4부 구성의 서사로 연출해낸다. 물론 어떤 물상들이 주로 새겨졌으며 그 특성이 어떠한지가 서사의 큰 줄기가 되지만, 샤먼과 사제였거나 한반도의 첫 번째 예술가들이기도 했을 그 크리에이터들의 정체와 생활상을 재현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인다. 뿐인가. 또 어떤 장은 오직 이 암각화로부터 비롯되었을 전설들로 채워져, 그때껏 선사시대 여행자 혹은 암각화 관람자로 책장을 넘기던 독자들에게 색다른 상상력의 차원까지 열어놓는다(고래 마을에서 전해 내려온다는 ‘고래가 된 소년’ 이야기는 곱씹을수록 애틋하다). 이렇게 저자는 네 번의 새김을 여러 겹의 기억으로 풀어내면서 역사, 미술(예술), 문학을 엮는 스토리텔링의 진수를 보여준다.
네 번에 걸쳐 새겨진 그 주인공들이 과연 누구였는지, 이제 저자의 말을 옮겨 먼저 간단히 소개해본다.
-첫 번째 새김
“반구대 암각화 바위에 처음 새겨진 것은 뭍짐승들이다. 너무 작게 새겨져 어떤 종류인지 알기 어려운 것들이 대부분인데, 사슴과나 개과 짐승으로 보이는 것들이 비교적 많다. 처음 새겨진 것들이라 이후에 크고 또렷하게 새겨진 것들로 말미암아 원형을 잃은 것이 많다.
처음 바위에 암각을 남긴 사람들이 사냥꾼이었음은 확실하다. 농사를 지으면서 바위에 짐승을 새길 수도 있지만, 초기의 암각 이후 새김 주제가 일관되게 사냥이고, 시기상으로도 한국에서는 청동기시대 초입에 들어서기까지 농경은 특정한 지역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반구대 암각화 바위가 사람들에게 화면을 제공하던 당시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 사람들은 사냥과 채집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두 번째 새김
“처음 바위에 띄엄띄엄 뭍짐승들을 새긴 이들이 태화강변 제 살던 곳을 떠난 지 수백 년 뒤, 다시 새로운 무리가 이 바위를 찾아 활이나 창으로 사슴이나 노루를 사냥하던 자신들의 모습을 새기며 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일이 몇 백 년 동안 계속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 새김이 시작될 때, 암각 예술가들은 이전과는 다른 기법을 사용했다. 표현 대상의 윤곽을 선으로 잡아낸 다음 선 안을 모두 파내는 면 새김 기법을 썼다. 이전의 작품에는 보이지 않던 기법이다. 새롭게 이런 면 새김 기법을 쓴 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선 새김과 다르게 면 새김은 새김을 시도한 예술가에게 더 많은 공력이 들게 하는 까닭이다. 아마도 이 역시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를 반듯하게 하고, 소망을 표현하는 강도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실제 표현 대상이 하나같이 아무런 무늬도 없는 민무늬 짐승은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새김
“반구대 암각화 세 번째 새김의 중심 주제는 고래 사냥이다. 57마리나 등장하는 고래 그림 대부분이 세 번째 단계의 새김 작업을 통해 바위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이 경우도 한 차례의 짧은 작업으로 화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고래들이 암각화로 붙박인 것은 아니다. 최소 수백 년에 걸친 여러 차례의 작업 결과가 오늘날 반구대 바위에서 볼 수 있는 생생한 고래 그림일 것이다.
세 번째 새김을 시도한 사람들은 이미 알려진 기법들을 모두 사용하면서 화면의 빈 곳을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뭍짐승들과 크기도 무게도 아예 다른 고래를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게 크고 뚜렷하게 새겼다. 또한 높은 절벽 위에서 넓은 바다를 내려다보며 고래 무리의 움직임을 관찰한 듯한 시각을 바탕으로 화면 안에 각각의 고래를 배치하고 표현했다.”
-네 번째 새김
“반구대 바위에 더는 고래가 새겨지지 않게 된 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새로운 기법으로 새로운 물상을 바위에 새기려는 사람들이 대곡천 곁 기암절벽 앞에 왔다.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는 알 수 없으나, 뭍짐승 사냥으로 살아가거나 사냥과 채집에 힘쓰면서 부분적으로나마 농경을 시도하던 무리였을 수 있다. 눈길을 끄는 건 새로 반구대에 암각을 한 사람들이 선택한 제재가 대부분 맹수라는 사실이다. 이들에겐 이런 짐승들이 경외의 대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구대 암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맹수 그림은 종교와 신앙, 민속의 원형을 보여주는 매우 귀중한 사례일 수 있다. 청동기시대 혹은 신석기시대 말까지는 신이 호랑이나 표범 같은 본래 모습 그대로 바위에 새겨지고 숭배되었을 수 있는 것이다. 반구대 바위에 마지막 새김을 시도한 사람들은 신으로서 숭배된 맹수들을 바위에 새기고 갈아 모습이 더 뚜렷하게 드러나게 하면서 마을을 보호하고, 사냥에 성공하며, 농사가 잘되기를 빌고 있지 않았을까.”
기억과 망각의 변주
그리고 내일
이렇게 반구대 암각화는 “뭍짐승을 사냥하던 사람들, 고래잡이가 생업이던 사람들, 맹수를 경외하던 사람들이 서로를 알지 못한 채 오랜 기간 여러 세대에 걸쳐 자신들의 생업과 관련이 깊은 존재를 익숙한 기법으로 새겨 형상화한” 것이다. 신과 나누는 대화였으며, 그를 향한 고백과 염원이 담겨 있었다. 무언가를 기억해두려 애쓰는 인간의 소산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반구대 바위는 사람들에게서 서서히 잊혀갔다. “암각화를 새기려고 물길을 거슬러 대곡천 바위 절벽까지 오는 사람도 없었고, 태화강 물줄기에서 벗어난 외진 곳을 찾는 이도 없었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성스러운 장소였던 곳이 어느 틈엔가 강변엔 갈대만 우거지고, 숲 깊은 곳에서 물 마시러 나오는 짐승들만 볼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 오지 않으면 잊힌다.” 저자의 아련함은 이렇게 맺혀 있었다. 1970년 다른 목적의 탐사대에게 우연히 재발견될 때까지, 이곳은 옛사람들의 새김과 그 기억의 수고가 무색해지도록 다시 긴 시간 망각의 늪 속에서 지내야 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앞에 몸을 드러내고 있는 이 반구대의 화폭은 누차 기억과 망각을 반복하며 세상의 온갖 이야기들을 변주시켜온 시간의 증거물과 같다.
언뜻 다시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들-이곳이야말로 기억뿐 아니라 망각 속에서도 존재해온 것이므로-크게 의아해할 것 없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기왕지사 21세기 새로운 기억의 시간대로 넘어왔으니, 이 소중한 유적의 보존을 위해 이제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참 많다는 게 저자의 당부다. 잔잔한 어조로 55꼭지 이야기를 만들어온 그가 마지막 꼭지 ‘내일’에서 “진정성”까지 소환해 호소해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