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생태철학자 발 플럼우드가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통해 직면한 인간과 자연의 가장 비밀스러운 진리!
왜 돼지는 먹어도 되고 개는 안 되는가? 개 식용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들려오는 항변이다. 그저 ‘보신탕’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이들의 볼멘소리라고 치부하기에 앞서 왜 많은 사람이 돼지를 먹는 것보다 개를 먹는 것이 더 비윤리적인 일이라고 느끼는지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악어의 눈』이 그 사유의 토대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저자 플럼우드는 악어에게 잡아먹힐 뻔한 경험을 공유하며 ‘먹이가 될 수 있는 존재’의 범위를 인간까지 확장하고, 영화 〈베이브〉에서 재현된 동물 농장의 경우를 예시로 들며 ‘존중 받아야 하는 존재’의 범위 안으로 돼지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 경계 밖에 어떤 생명 종도 남겨두지 않는다. 개별적 집합 두 개로 나뉘어 있던 존재들이 완전한 교집합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먹이고 동시에 먹이 그 이상”이다.
돼자나 개나 먹이사슬의 일부이니 개를 마음껏 잡아먹어도 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포식 그 자체나 먹히고 사용되는 생명의 종류가 아니라 그 생명과 우리 자신을 완전히 다른 범주로 바라보고, 그들을 고깃덩어리로 환원하여 도구화하는 일이라는 것이 플럼우드의 관점이다. 개를 먹는 일이 돼지를 먹는 일보다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인간이 오래전 개를 길들이며 윤리적 고려의 범주 안으로 끌어들인 반면, 돼지는 고기의 범주에 남겨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개를 오직 고기로 바라보며 사육하고 도구화한다면 그것이 비판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플럼우드가 동물의 모든 쓰임을 예외 없이 완강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를 비판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세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동떨어진 방식의 채식주의는 존중 받는 생명의 범위를 인간 밖으로 확장할 뿐 윤리적 범주와 생태적 범주의 경계를 더욱 공고히 하며, 그 경계 밖에 존중의 대상이 되지 않는 존재를 여전히 남겨둔다. 농작이 여의치 않거나 오히려 포식보다 생태에 악영향을 미치는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사냥과 포식조차 서구인의 시각에서 재단한다는 것, 동물을 극도로 도구화하고 ‘살’이나 ‘고기’로 환원하는 공장식 사육 농장과 비교적 동물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는 농장 사이의 차이를 지워버린다는 점 역시 저자가 지적하는 존재론적 완전채식주의의 한계다.
플럼우드에게 죽음은 우월한 영혼이 열등한 육체를 지상에 남겨두고 천국으로 향하는 일이 아니며, 그렇다고 모든 이야기가 끝나버리는 종착역도 아니다. 우리의 몸이 땅에 묻혀 수많은 벌레와 미생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그 토양에서 식물이 자라나고 그 식물이 동물의 먹이가 됨으로써 우리는 지구적 생태 공동체의 서사 안으로 걸어 들어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먹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동시에 비인간 존재가 존중과 윤리적 고려의 대상임을, 우리와 그들의 세계가 나뉘어 있지 않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플럼우드가 악어의 눈을 통해 발견하고, 이 책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는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