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또 같이!
같이 있고 싶지만 때때로 혼자 있고 싶은 이들을 위한 그림책
곰은 숲속에서 피아노를 치곤 한다. 그러면 동물들은 곰의 피아노 연주를 듣는다. 어느 날 피아노를 실컷 친 곰이 연주를 멈추었을 때 문제가 생겼다. 동물들이 “한 곡 더!”를 외쳤기 때문이다. 쉬고 싶은 곰과 피아노 연주를 더 듣고 싶은 동물들 사이의 결론은? 그리고 곰 앞에 나타난 색다른 얼룩말의 정체는?
이 그림책은 우리가 흔히 느끼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을 탁월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곰이 숲속의 동물들 앞에서 피아노를 치듯 때로는 남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고 싶다. 그러다가도 곰이 자신에게 지나친 기대를 거는 동물들을 피해 도망치듯 혼자 있고 싶어지곤 한다. 두 가지 감정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늘 우리 마음속에 공존하며 시소를 탄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보편적인 욕망이면서도 말로는 잘 설명하기 어려웠던 감정이다. 때문에 이 그림책을 한 장씩 넘길 때마다 맘속에서 내내 근지러웠던 어느 한구석을 긁은 듯 시원함이 느껴진다. ‘아, 나도 이럴 때 많아.’ 하며 공감하고 ‘다들 그렇구나.’ 하며 위로를 얻는 것이다.
특별히 이 책에서 곰과 얼룩말의 관계는 주목할 만하다. 지쳐서 쉬고 싶은 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의 필요만을 요구하는 숲속 동물들 가운데에서 얼룩말만은 어딘가 좀 다르다. 자신의 마음을 상대에게 지나치게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의 마음이 지금 어떤지 가만히 귀 기울여 준다. 혼자 또 같이,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모두를 행복하게 만드는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그림책이다.
‘피아노 치는’ 곰과 ‘읽는’ 얼룩말의 특별한 우정!
네덜란드 그림 작가 에스카 베르스테헨이 한글로 작업한 그림책
주인공인 ‘피아노 치는’ 곰 곁에 흥미로운 동물이 다가온다. 바로 책을 좋아하는 ‘읽는’ 얼룩말이다. 여기서 ‘읽는’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 있다. 이 얼룩말은 ‘책을 읽는’ 얼룩말인 동시에, 존재 자체로 ‘읽는’ 얼룩말이다. 얼룩말의 몸에 있는 얼룩이 이 책에 나오는 한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놀랍게도 그 장면의 한글 텍스트를 이용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네덜란드의 그림 작가 에스카 베르스테헨이 전 세계 수출 도서에 그 나라의 언어로 그림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 한국어판 역시 한글을 이용한 그림 작업을 직접 했다. 얼룩말의 얼룩이 글자로 이루어진 무늬라는 발상도 독특하지만, 그것에 각 나라의 독자들이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의미를 부여한 것 또한 높이 살 만하다.
책을 읽는 얼룩말이 그 자체로 읽는 얼룩말이 되면서, 얼룩말이 실은 책은 아닌가 짐작하게도 한다. 책이야말로 혼자 있고 싶을 때 좋은 친구가 되어 주면서도 귀찮지 않은 존재가 아닌가? 물론 해석은 독자들의 몫이자 즐거움이지만 말이다. 피아노 치는 곰과 읽는 얼룩말의 특별한 우정 속으로 독자들을 초청한다.
서정적인 흑백 톤과 따뜻한 붉은색의 조화!
곰과 함께 그림 속에서 쉬어 가는 그림책
전반적으로 흑백 톤에 포인트로 붉은색이 사용된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일체의 색깔을 배제하고 흑백 톤의 미묘한 농담으로만 그림을 구성했다. 덕분에 갖가지 자극에 시달린 눈과 마음이 편안하다. 차분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도 감돈다. 재차 책을 보면 지쳐 있는 곰의 마음이 표현된 것 같기도 하다. 많은 동물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깜깜하고 쓸쓸해 보인다. 이때 얼룩말의 책, 나뭇잎, 해, 주전자의 수증기 등이 붉은색으로 표현되어 아름다움을 더한다. 자칫 가라앉아 보일 수도 있는 그림에 따뜻함과 생기를 가미해 준다.
한편으론 얼룩말이 들고 있는 빨간색 책 덕분에 곳곳에 조그맣게 숨어 있는 얼룩말을 찾기가 한결 수월하다. 계속 곰 곁에 있지만 곰을 귀찮게는 하지 않았던 얼룩말은, 그 심성처럼 늘 곰 멀찍이에 있다. 이런 얼룩말을 찾는 것은, 다소 성인스러운 감성으로 표현되어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이 책에 숨겨진 자그마한 재미 요소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의 시선도 배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