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즉 현대 영화가 필요로 했던 모든 것은 20세기 유럽에서 어떻게 탄생했는가?
본서는 일종의 세계 영화사의 ‘심리학적 고고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자가 발굴하는 대중의 심리라는 지층은 한편으로는 20세기 초의 파란만장한 정치사라는 지층과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이라는 예술=기술의 지속적 발전이라는 지층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그리고 어찌 보면 당연히 본서가 영화사의 영원한 고전이라는 지위를 얻게 된 것은 이 세 지층이 어떻게 상호 협력하고 갈등하는 가운데 ‘시대정신’을 반영하고, 그것을 주도했는지를 보여주는 시선이 워낙 빼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비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미장센이나 등장인물의 표정과 ‘정체’에서 시대정신의 징후나 정치적 변화의 추이를 간파해내는 그의 예리한 시선은 아마 당대를 현장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며 영화와 관련된 거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할 수 있는 저자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경지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고전은 추상적 추론이 아니라 현장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는 당연한 사실을 본서 저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나 쓸 수 없으며 오직 그만이, 가령 단테만이 쓸 수 있는 책이 고전에 대한 규정 중 하나라면 본서야말로 크라카우어만이 쓸 수 있는 20세기 영화사의 영원한 고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고전에 대한 규정 중의 하나로 ‘당대성과 보편성’의 종합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당대에 대한 곡진하고 핍진한 서술과 동시에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이야기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보편성을 동시에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가령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일리아스」에 나오는 키르케의 유혹 장면에서 현대 자본주의의 대중문화의 변증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와 비슷하게 본서 또한 20세기 초의 영화와 정치를 ‘심리학적 역사’라는 붉은 실로 하나로 꿰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대중문화의 역사적 파노라마에 대한 영원히 보편타당한 분석처럼 보인다. 가령 그는 20세기의 ‘고독한 군중’이 정치와 영화에서 어떻게 위안과 ‘분노의 분출구’를 찾았는지를 보여주는데, 그의 분석을 따라가노라면 히틀러의 등장이 정치적 우연이 아니라 역사적 필연임을 누구나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본서 제목이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인 연유이다.
중산층의 ‘심리’가 맨붕 중인 오늘날의 칼리가리들과 히틀러들은 누구일까?
‘칼리가리에서 히틀러로’는 단지 20세기 초에 국한된 현상일까? 저자의 분석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어찌 보면 20세기의 주인공이라고 상정되는, 하지만 좀체 분석 대상이 되지는 않았던 ‘중산층’의 역사적 추이와 정치적 동향을 분석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저자의 또 다른 저서 「회사원」이 그것을 잘 보여주는데, 21세기 초의 시선으로 보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20세기에 가령 짐멜 정도의 선구적 이론가를 제외한다면 도시와 ‘중산층’에 주목한 좌우파 연구와 비평은 그리 많지 않았음을 고려해본다면 그가 얼마나 빼어난 이론가인지를 알 수 있다. 동시에 아도르노의 스승이지만 후일 그에게서 푸대접을 받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얼마나 주류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유추할 수 있을 것인 바, 그가 벤야민과 인간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상적으로 연결되는 이유 또한 유추 가능한 것이다.
크라카우어의 연구는 대중, 구체적으로 중산층의 심리적 동향을 예술의 추이와 연결지어 설명하는 것으로 시종하는데, 아마 21세기에도 그의 분석이 효력을 잃지 않는 주요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특히 트럼피즘으로 대표되는 미국이나 ‘영끌’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중간’이 실종되고 있는 현금에서 그것만으로도 그의 고전을 다시 일독하면서 오늘날의 ‘칼리가리들’과 ‘히틀러들’을 찾아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