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계에 막대한 공헌을 남긴 로잘린드 프랭클린
『생명의 비밀 : 차별과 욕망에 파묻힌 진실』은 마치 영화의 오프닝 장면처럼 시작된다. “1953년 2월 28일 예배당 종소리가 정오를 알린 직후, 두 남자가 케임브리지대학 캐번디시물리학연구소 계단을 뛰어 내려왔다. 두 사람은 기쁨에 들떠서 자신들의 일생일대의 과학적 발견을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었다.”(11쪽)
무엇보다 이 책은 DNA 구조를 규명하기 위한 경쟁의 이면에 있던 사람들의 삶과 서로의 관계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예를 들어 프랜시스 크릭이 아침 식사로 먹은 계란프라이의 “바삭한 노란색 찌꺼기”(277쪽)부터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하이힐이 킹스칼리지 런던의 “젖어서 번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또각또각”(241쪽) 울리는 모습 등의 시각적인 부분까지도 아주 자세하게 들여다본다.
영화에 영웅과 악당이 필요하듯이 이 이야기에서 영웅은 똑똑한 여성이자 유대인,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프랭클린이다. 물론 악당은 1968년의 회고록에서 “끝을 모르는 간교하고 교활한 태도로 역사적 기록을 무리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20~21쪽) 제임스 왓슨이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 왓슨과 크릭이 자기들의 업적을 미화하고 기념되게 하는지, 반면 프랭클린의 공헌은 어떻게 폄훼했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또 조직 내 정치, 상당히 사적인 인물 묘사[“왓슨은 아주 마른 데다 부끄럼이 많고 생김새가 특이한 운동신경이 없는 소년으로, 툭 튀어나온 눈에 특유의 표정을 짓는 버릇이 있었다”(143쪽)], X선 결정학, 분자생물학, 수학 등 과학적인 내용에 관한 놀라울 정도로 명확한 설명으로 완성된다.
마르켈은 로잘린드 프랭클린에 대한 일련의 오해들을 바로잡기 위해 주요 인물들의 회고록과 자서전은 물론 다른 많은 자료를 인용했다. 프랭클린의 고뇌가 담긴 노트는 물론 케임브리지와 킹스칼리지에 그녀가 남긴 문서들, 철저하게 보관되는 노벨상 위원회의 기록보관소, 원전 혹은 생존자와의 인터뷰 등도 참고했다. 이 중에 가장 눈을 사로잡는 것은 2018년, 90세의 왓슨과 나눈 일련의 대화이다. 왓슨은 “아프리카인,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시아인, … 동유럽 유대인 등 다른 민족 집단을 향한 불쾌한 시각을 서슴없이 표출했다.”(537쪽) 프랭클린도 노벨상을 공동 수상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에 분노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프랭클린과 관련해 “내가 진짜로 고결한 사람이라고는 당신도 말하지 않을 것”(542쪽)이라며 마지못해 인정하기도 했다.
그만큼 세월이 지난 후에 과거를 인정하는 발언이 나온 것도 주목할만하지만, 이 발언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의 구체적인 사건뿐이다. 바로 1953년 1월 30일, 프랭클린의 동료 모리스 윌킨스가 프랭클린의 그 유명한 ‘51번 사진’을 그녀에게 알리거나 동의를 구하지도 않은 채 왓슨에게 넘겼던 순간이다. 나중에 회고록에서 묘사한 것처럼 이 순간은 왓슨에게 유레카를 선사했다. “그 사진을 본 순간 입이 벌어지고 맥박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400쪽) 사진 속에는 DNA B형의 이중나선 무늬가 드러나 있었고, 왓슨은 작업 중이던 3차원 모형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되었다.
크릭은 1953년 2월 중순 또 다른 행운의 동전을 줍게 되는데, 프랭클린의 다른 작업물이 이번에도 그녀가 모르는 사이에 크릭의 손에 들어갔다. 나중에 크릭은 “(우리는) 단서가 필요했다. 그 단서는 로잘린드 프랭클린의 자료였다”(425쪽)고 적었다. 마르켈은 관련된 모든 남자를 분명하게 비난하는데, 특히 크릭과 왓슨을 거침없이 규탄한다. 마르켈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네이처』에 제출한 역사적인 논문에서 “로잘린드 프랭클린이 공헌한 연구의 공식적인 인용을 빠트린 것은 왓슨과 크릭이 저지른 잘못 중에서도 최악이다.”(493쪽)
마르켈은 남성 동료들에게는 허용되었던 성격의 결점을 이유로 프랭클린에게 일종의 차별(혹은 처벌)이 가해졌던 여성혐오와 이기주의적 풍조를 선명하게 그려냈다. “프랭클린은 성격이 모나고 거만했다. 왓슨은 오만했다. 크릭의 자만심은 초인적이었다. 윌킨스가 프랭클린과 나쁜 관계를 형성한 탓에 프랭클린이 킹스칼리지에서 완전히 쫓겨났다” 등이 그렇다. 한편 이렇게 하나의 거대한 발견이 이루어지는 데 다른 많은 과학 분야의 지식과 뚜렷하게 다른 성격을 지난 인물들이 필요했다는 것도 눈여겨볼 만하다. “한 사람은 자신의 연구를 굽히지 않는 전문적 태도를 지니고 엄중하고 성실했다. 다른 사람은 앞일을 걱정하지 않는 재기발랄한 젊은이였다.”(476쪽) 생명의 비밀을 건 이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는 토끼가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상대편 과학자들끼리 협업할 수 있었다면 DNA의 비밀은 얼마나 더 빨리 밝혀졌을까? 1등만 보상하거나, 학회지에 논문을 게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압박이 있는 실상은 오늘날의 학계도 마찬가지다. 시사하는 바가 크다.
프랭클린은 영영 손에 들어오지 않았던 영예에 거의 아쉬운 마음을 품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침내 그녀가 크릭과 왓슨의 모형을 검토했을 때, 그녀는 모형이 자신의 연구와 부합한다는 점에 기뻐했다. 그녀는 “우리는 모두 서로의 어깨를 밟고 서 있다”(473~474쪽)고 말했다. 이 대목에선 프랭클린의 배포 혹은 아령도 느껴진다. 그러나 왓슨은 프랭클린을 “패배자”라고 불렀다.
과학계에 남긴 막대한 공헌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그녀는 1958년 37세에 난소암으로 사망했다. 아마도 프랭클린은 영화의 주인공이 되는 것을 몹시 싫어했겠지만, DNA 이야기 속에 그녀의 자리를 되찾아주는 이런 책을 맞이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는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