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이 저물어야 밤이 오고, 그제야 별이 하늘에 떠오릅니다.”
“고개를 들어 별을 보라”고 연설하던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모습을 기억하시는지. 연인에게는 사랑의 증거, 철학자에게는 도덕의 원리, 때로는 미국의 성조기나 중국의 오성홍기처럼 국가의 가장 중요한 심볼로 받아들여지는 천공의 별은 인류의 영원한 꿈의 상징이면서, 한편으로는 우리 상상력의 고향이기도 하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 총기획자, 《축소지향의 일본인》으로 대표되는 비교문화학의 거두, 여러 첨단산업 CEO의 멘토, 초대 문화부 장관 등 다방면을 누비며 활약했던 인물, 이어령. 그러나 역시 독자들에게 가장 오랫동안 익숙했던 이미지는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의 모습이 아닐까.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에서 그는 한국인의 문화유전자와 심성이 아로새겨진 ‘탄생과 육아’, ‘식문화’, ‘인공지능’, ‘제국주의와 동양’이라는 구체적인 테마를 다뤄 왔지만, 신작 《별의 지도》에서는 별로 표상되는 인간의 꿈과 이상, 그리고 문학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는 김소월의 시, 〈진달래꽃〉을 해설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 시는 이별을 노래하는 시가 아닙니다’. 듣고 보면 실제로 그렇다, 미래의 일을 놓고 이야기하는 가정법(If)으로 쓰인 이 시에서 이별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별가라는 ‘선입견’이 우리를 특정한 사고의 틀 안에 가둬두고, 그 안에 담긴 열렬한 사랑을 보지 못하게 만든 것.
이제까지와는 다른 무언가를 창조하려면, 스테레오타입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려면 자신만의 가치 기준을 가지는 것, 속세에 얽매이지 않는 판단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별의 마음’이라고 부르는 상상력이 그곳에서 나온다.
그 별로의 여행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이어령은 자신이 일생에 걸쳐 기록해온 별의 항로도를 펼치며 동행을 제안한다. 이 항해에서 첫 번째 뮤즈 역할을 하는 시인, ‘단테의 베르길리우스’는 저 유명한 윤동주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가장 익숙하게 배운 시인 중 한 명이자, 가장 이상주의적인 시인이면서, 가장 서정적인 시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왜 문학을 읽는가’에 대답이 될 책
이어령이 윤동주의 손을 잡는 이유는 꼭 하늘로 향하려는 그의 올곧은 의지 때문만은 아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그가 아울러 가졌기 때문이다. 오직 ‘하늘’의 힘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단지 이상만 존재하는 이상주의가 이데올로기에 경도된 인간상을 낳은 것을 우리가 역사에서 자주 보아 왔듯이. 여기서 이어령이 발견하는 것은 천지인(天地人), 즉 하늘-땅-사람의 삼항 관계에서의 조화(harmony)다.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한편으로는 삶의 끌어내림에 저항하면서도 여전히 삶을, 자기보다 더 약한 이들의 삶까지 사랑할 줄 알았던 사람. 이어령은 바로 그렇기에 윤동주가 여성에게 사랑받는 작가가 될 수 있었다고 평한다.
‘손뼉을 치듯’ 날개를 펴고 비상하려는 억압받은 사람들의 의지에 대해 저자는 한 장에 걸쳐 중요하게 다룬다. 저자가 영면 직전의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보리처럼 밟힌 마이너리티(소수자)가 이끌 것”이라고 밝혔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현실의 끌어내림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그것을 떨쳐 버릴 진취와 창의의 이념은 더 절실하게 요구되는 법이니까(앞서 호킹의 말이 특히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이유겠다).
그런 마음을 가진 이들을, 저자는 시인이라고 말한다. 윤동주는 물론, 스티븐 호킹도, 안중근도,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도, 우주선을 탄 우주인들도, 그리고 별을 보는 마음으로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시인이라고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을 가지고, 풀잎의 괴로움을 가지고, 죽는 날까지 부끄러움이 없이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그래서 서로 눈과 눈을 마주치면서 별을 보고 하늘을 보는 여러분이 시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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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어령의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 시리즈 소개
소멸하지 않는 지성의 불꽃놀이!
채집 시대로부터 정보화 시대를 넘어가는 거대한
문명의 파도타기가 시작된다
2022년 우리 곁을 떠난 이어령의 유작 시리즈, ‘한국인 이야기’ 그리고 ‘끝나지 않은 한국인 이야기’는 총 10권으로 기획된 라이프워크다. 삶을 마무리하는 순간에는 자신을 돌아보기 마련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한국의 대표 지성’이라는 이름답게, 이어령은 과거, 현재, 미래의 한국인들로 시야를 넓혔다. 저자는 물론 한국인 하나하나의 얼굴이 살아있는 총체극, 이어령 생애 최후의 대작이다.
‘방탄소년단’,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케이팝, 영화, 드라마 전방위에 걸친 한류 열풍 속에서 한국, 그리고 한국 문화에 대한 관심이 지구촌 곳곳에서 뜨겁게 일어나는 중이다. 한국 바깥에서도 알고 싶어 하는 우리 문화의 개성과 저력을, ‘한국인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시선으로 조명한다. ‘생명자본’과 ‘문화유전자’ 두 키워드로 한국인의 미래상을 그리는 프로젝트다.
생전 이어령 자신이 ‘백조의 곡’이라고 평한 ‘한국인 이야기’의 집필과 더불어 저자는 자신을 ‘이야기꾼’으로 정의했다. 책을 펴서 덮을 때까지 그의 탁월한 스토리텔링은 물론, 그 안에 은하수처럼 펼쳐지는 지식의 폭과 깊이, 시공을 넘나드는 인문학적 통찰, 그리고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빛났던 탐구 정신에 여전히 감동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