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먼저 20주기와 30주기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여러 연구자들의 논문을 중복되지 않게 1편씩 선별해 실었다. ‘고정희와 여성적 글쓰기’라는 주제 아래 20주기 학술대회에 발표되었던 논문 중 7편을 수록했다.
김승희의 「고정희 시의 카니발적 상상력과 다성적 발화의 양식」
고정희의 후기 시집 『여성해방출사표』(1990)에 나타난 카니발적 상상력과 발화 양식의 다성적 양상을 탐색하고자 한 논문이다. 『여성해방출사표』의 세계를 담론과 담론이 충돌하여 다성적 목소리가 공명하는 카니발적 세계로 규정하고 카니발적 세계를 이루는 공간성과 시간성, 텍스트의 잡종적 양상, 다성적 발화의 양식이 생성되는 구조를 탐색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고정희의 『여성해방 출사표』를 카니발적 세계관과 다성성을 보여주는 한국 최고의 페미니즘 텍스트로 규정한 점이 특징적이다.
김진희의 「시로 쓰는 여성의 역사」
고정희가 시를 통해 여성의 역사를 재구성하려 했다는 데 착안해 시로 쓰는 역사로서의 의미와 의의를 밝히고자 한 논문이다. 역사를 재구성하는 고정희의 시편들 중에서 ‘이야기 여성사’ 연작을 중심으로 미학적 특성 및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을 규명해보고자 한 것이다. 고정희의 역사 시편들은 역사와 문학의 경계에서 남성 중심의 역사에 대한 비판을 수행하고, 여성-어머니의 가치라는 삶의 원리에 대한 지향을 통해 미래 역사에 대한 창조적 전망과 상상을 보여준다고 이 논문은 평가하고 있다.
김문주의 「고정희 시의 종교적 영성과 ‘어머니 하느님’」
고정희 시가 명확하게 기독교적 관점 아래 정초되어 있다는 점에 착안해 고정희의 시에서 기독교적 세계관이 민중과 여성이라는 축을 어떻게 전유해 자신의 사유와 비전을 탐색해 가는지를 살핀 논문이다. 암담한 역사적 현실 인식과 수난 형상이 주를 이루는 고정희 시에서 종교적 영성이 어떤 역할을 담당하고 기독교 세계관의 지평이 어떻게 개진되는가를 분석함으로써 고정희의 시가 보여준 모성적 신관이 예수의 삶을 이념적 지표로 삼아 민중의 고난을 살고자 한 민중신학의 수난의 영성의 일환이자, 새로운 해방-신학의 정초임을 확인하였다.
김난희의 「고정희 ‘굿시’에 나타난 기호적 코라의 특성-『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대상으로」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기독교적 세계관에서 ‘어머니 민중’으로의 시적 전환을 가져온 시집으로 평가하면서, 크리스테바의 ‘기호계적 코라(the semiotic chora)’ 개념을 통해 고정희의 굿시에 나타난 언어적 특성을 살펴본 논문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언어의 육체성과 물질성을 극대화시키는 ‘육발(肉勃)’의 언어가 잃어버린 에너지를 굿판에 되살리고 사랑의 윤리를 적극적으로 실천하면서 여성 민중들의 온전한 삶의 에너지를 회복하고자 하는 언어적 실천으로 나아간다.
윤인선의 「고정희 시에 나타난 현실에 대한 재현적 발화 양상 연구-시적 발화를 통한 아이러니의 기호작용을 중심으로」
고정희 시의 현실에 대한 재현적 발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시적 언어의 특징과 그 기호작용에 관해 연구한 논문이다. 고정희가 자신이 인식한 현실을 ‘어떻게’ 발화하고 있는지 살펴봄으로써 발화수반력과 발화효과력이 각각 현실에 대한 발화와 종교를 통한 발화로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기호작용의 모습을 아이러니로 간주하며 고정희의 시 쓰기가 시적 언어들 간의 아이러니적인 기호작용을 통해 현실을 인식하고 발화하는 전복적이고 이데아 지향적인 과정이라고 해석한다.
문혜원의 「고정희 연시戀詩의 창작 방식과 의미-『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중심으로」
『아름다운 사람 하나』를 중심으로 고정희 연시의 창작 방식과 의미를 살펴본 논문이다. 시집 수록시 중 개작된 시들은 원래의 시가 가진 특정한 사회적 사건이나 개인적인 경험을 삭제하거나 간접화함으로써 시의 내용을 일반적인 상황으로 바꾸고 일정한 형식과 구절을 반복함으로써 대중성을 확보했음을 알 수 있었다. 개인적인 사랑에서 출발해서 더 큰 사랑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준 고정희의 연시는 시인의 이념적 지향이 발전되고 체화되어 가는 과정을 ‘사랑’이라는 주제로 형상화한 시편들이라고 이 글에서는 평가한다.
이소희의 「연작시 「밥과 자본주의」에 나타난 “여성민중주의적 현실주의”와 문체혁명-「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을 중심으로」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 중 「몸바쳐 밥을 사는 사람 내력 한마당」을 중심으로 고정희의 ‘여성민중주의적 현실주의’와 문체혁명이 지니는 의미를 밝힌다. 고정희는 ‘여성민중주의적 현실주의’ 글쓰기 형식을 우리 자연과 일상 생활문화에 뿌리를 둔 전통구비 장르에서 차용해 왔는데 형식적으로는 전통적 가치를 계승하면서 이념적으로는 억압된 여성의 권리를 찾는 데 주력하며 이를 조화시킨 고정희 시의 성취에 이소희는 특히 주목한다. 역사성과 능동성을 갖춘 ‘여성’ ‘민중’ 주체의 형상화는 “여성민중주의적 현실주의”를 반영한 문체혁명의 일례를 보여준다는 것이 이 논문의 관점이다.
제2부
‘고정희와 여성시의 실천’이라는 주제 아래 30주기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중 6편을 수록했다. 20주기 학술대회로부터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고정희 시에 대한 최근의 연구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논문들이 주를 이룬다. 페미니즘 리부트 시대를 통과하며 고정희 문학이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어떤 요청 아래 놓여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논문들이다.
양경언의 「고정희의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와 커먼즈 연구」
「밥과 자본주의」 연작시를 커먼즈(commons)의 실천으로 보는 관점에서 출발한다. 1990년대 초반에 쓰인 「밥과 자본주의」 연작에는 제국주의적 자본주의가 뿌리내리는 과정이 사람들의 체질을 어떻게 바꿔나가는지에 대한 예리한 성찰이 담겨 있다는 것이 이 논문의 판단이다. 특히 고정희 시가 ‘밥’을 둘러싼 관계에 참여하는 존재들의 목소리가 스스로 살아나는 현장을 그렸다는 데 주목한다. 「밥과 자본주의」 연작의 파급력은 많은 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져 모두의 노래로 불리게 하는 데 있다고 본 것이다.
이은영의 「고정희 시에 나타난 불화의 정치성-마당굿시를 중심으로」
랑시에르의 개념을 빌려 고정희의 마당굿 시가 정치적인 것의 불화를 일으키는 텍스트임을 분석한다. 고정희 마당굿시의 형식은 치안의 질서 안에서 합의된 몫의 나눔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몫의 재분배를 위해 기존의 인식과 긴장을 일으키며 불화를 경험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락원 기행』의 「환인제」, 『초혼제』의 「사람 돌아오는 난장판」,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통해 1980년대 고정희의 마당굿시가 기존의 분할된 질서에 균열을 내며 여성, 노동자, 민중이 평등한 존재임을 끊임없이 감각하게 하는 정치성을 드러낸다고 평가한다.
장서란의 「고정희 굿시의 재매개 양상 연구-『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대상으로」
고정희의 장시집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를 중심으로 재매개(re-mediation) 개념을 통해 고정희 굿시의 간매체성을 밝히고 굿시가 지닌 문학적 저항성을 규명하고자 한다. 굿시는 굿의 제의성을 전유하고 굿의 양식을 변용하는 것은 물론 시의 매체성을 통해 굿의 현장성을 확장함으로써 참여자의 범위를 넓히고 현실 문제의 해결을 꾀한다. 이처럼 굿시의 가치는 굿이 지닌 상징적 씻김, 즉 텍스트 너머의 ‘열린 씻김’을 추구한다는 데 있다는 점에서 『저 무덤 위의 푸른 잔디』를 재매개된 굿-시로 보는 것이 이 논문의 관점이다.
이경수의 「고정희 시의 청각적 지각과 소리 풍경」
고정희의 시에서 두드러지게 ‘소리’가 포착된다는 사실에 주목해 고정희 시집 전체를 대상으로 고정희 시에 나타나는 청각적 지각을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해 그 의미를 살펴본 연구이다. 소리가 직접 나타나는 유형의 시, 1980년대를 표상하는 소리들이 시대의 소리 풍경으로 나타나는 시, 마당굿 형식을 차용한 시에서 들려오는 타인의 목소리라는 세 가지 유형을 통해 여성 주체로서 바깥의 소리에 반응하는 태도와 시대의 소리 풍경, 여성주의적 말하기 방식으로써 창안해 낸 소리 풍경 등을 살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종교와 시대와 여성주의적 문제의식이 교차하는 고정희 시의 성취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김정은의 「1980년대 여성주의 출판문화운동의 네트워킹 행위자로서 고정희의 문화적 실천」
여성주의 출판문화운동에서 여성들의 네트워크를 활성화하기 위해 고정희가 한 역할을 살펴보기 위해 고정희가 ‘또 하나의 문화’에서 『여성해방의 문학』을 발간하기 위해 했던 문화적 활동을 네트워킹 행위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고정희는 여성 지식인 주체들을 연결하는 등 페미니즘 문화의 ‘봇물을 트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여성신문』을 통한 출판문화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특히 고정희가 믿었던 ‘여성 연대’의 힘과 여성들의 네트워크는 고정희의 사후에도 작동하고 있음에 주목하며 고정희를 여성이 여성과 연결될 때 생기는 힘을 보여주는 중요한 페미니즘적 유산(legacy)으로 보고자 한 관점이 인상적이다.
정혜진의 「고정희 시의 섹슈얼리티와 ‘페미니즘의 급진성’」
체험·경험의 동일성이 아닌 자매애의 가능성을 모색하고 규범적 이성애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의식을 페미니즘 의제로 구성한 고정희의 여성해방론을 고찰하고자 한 연구이다. 고정희가 내적 분할에 대한 앎으로서의 ‘여성 동일시’를 여성해방 주체화의 전략으로 삼고, ‘정상 섹슈얼리티’ 규범을 문제화하는 주체로서 ‘독신자’를 여성해방의 역사에 위치시키는 장면에 주목함으로써 고정희 시가 성별 이분법을 극복하는 페미니스트 실천으로 전개되고 자매애를 여성해방 주체의 원리로 재구성함을 규명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이념을 구성하는 연대의 원리로 「다시 오월에 부르는 노래」를 해석한 것도 이 논문의 성과이다.
제3부
‘고정희와 문화 번역’이라는 주제 아래 20주기와 30주기에 발표된 논문 중 고정희를 문화 연구나 비교문학, 번역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 논문들을 실었다. 두 차례의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은 아니지만 새로운 세대의 고정희 문학에 대한 관점을 보여주는 논문을 함께 싣기도 했다.
박주영의 「신화·역사·여성성-이반 볼랜드와 고정희의 다시 쓰는 여성 이야기」
아일랜드의 여성 시인 이반 볼랜드(Eavan Boland)와 한국 여성해방문학의 독보적 시인 고정희의 시가 전통적인 가부장적 시각에 대한 첨예한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여성 이야기를 ‘새롭게 바라보기’를 통하여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문학 전통을 전복하는 새로운 여성시의 영역을 어떻게 보여주는지 탐구한다. 이반 볼랜드와 고정희의 시들은 남성 중심적인 시각에 의해 왜곡된 여성의 이미지를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며, 역사 안에서 침묵하던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하여 형상화한다. 리치가 역설한 여성시인들의 ‘새롭게 바라보기’ 시 쓰기는 볼랜드와 고정희가 구현한 시적 주제라고 이 논문은 평가한다.
정은귀의 「땅의 사람들을 기억하고 살리는 목소리-고정희와 조이 하조의 생태시학」
생태 시학의 관점에서 고정희와 아메리카 인디언 시인 조이 하조(Joy Harjo)를 함께 읽으려는 작업이다. 두 시인의 시에는 땅 위에서 살다 죽어간 존재들에 대한 보살핌과 품어냄의 시선이 나타나는데 이는 탈식민주의, 여성주의적 문제의식과 결합된 언어로 빚어졌다. 또한 이들의 시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익숙한 구어를 동원해 낮은 시선에서 얻어지는 혁명성을 성취하고 있다. 정은귀에 따르면 고정희의 한국어와 조이 하조의 영어는 땅의 리듬과 결합하여 보살핌, 품음, 희생, 사랑의 원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시의 실천적 의미를 부각시킨다.
김양선의 「민주화 세대 여성의 실천적 글쓰기와 80년대 여성문학비평-고정희의, 고정희에 대한 여성문학비평이 남긴 것」
이십대에 『여성해방출사표』를 읽으며 선명한 여성해방 의식을 다졌던 여성 주체가 근 이십 년이 지나 고정희의 「사십대」를 다시 읽으면서 공감하게 되는 과정을 민주화 세대로 불리는 지식인 여성의 경험과 글쓰기 실천의 맥락에서 객관화해 보고자 한 연구이다. 민주화 세대 지식인 여성의 사회체험과 문학체험의 맥락에서 80년대 여성문학 논쟁을 고정희의, 고정희에 대한 비평이라는 우회로를 거쳐 비판적으로 검토한 이 글을 마무리하면서 「우리 동네 구자명 씨」에서 여성의 고단한 삶을 드러낸 “저 십 분”이 환기하는 절박함을 핍진하게 읽는 일하는 중년 여성의 실감을 고백한 부분이 인상적이다.
채연숙의 「문화적 기억과 문학적 기억으로서의 여성시-고정희 시인과 힐데 도민의 시를 사례로」
문화권은 서로 다르나 정치적인 억압의 시대를 살아온 한국의 고정희 시인과 2차 대전 후 시대적 전환점을 돌아 나왔던 독일의 힐데 도민 사이의 상관관계를 문화적 기억과 문학적 기억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한 논문이다. 사실과 역사적 사건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퇴색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가까워지고 생생해진다는 사실을 두 여성 시인이 알려준다고 이 논문은 말한다. 고정희와 도민의 시가 보여준 문화적 기억은 고통의 시대를 희망의 시대로 부활시키는 ‘망자 추모’의 기림에 있으며, 이들의 시야말로 시대를 초월해 살아남은 문화적 기억의 실체임을 피력한 글이다.
최가은의 「여성-민중, 선언-『또 하나의 문화』와 고정희」
『또 하나의 문화』와 『여성(과 사회)』 간의 논쟁과 그들의 활동이 이룩한 여성문학 담론의 성취와 한계를 살펴봄으로써 여성 억압의 주요 모순을 무엇으로 볼 것이냐에 따라 나뉜 이분법적 가름으로는 포섭되지 않는 균열에 주목한다. 정치적 주체가 될 권리를 요구하는 페미니즘적 ‘선언’의 형식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역설이자 이 역설을 언어적 역량으로 활용한 사례로서 고정희의 텍스트를 살핌으로써 ‘인간=민중’이라는 명제와 ‘여성=정치적 주체’라는 명제를 선언한 고정희의 텍스트들을 비민중, 비여성이 처한 자리를 지시하는 문제적 장소이자 저항의 기점이 되는, 여전히 존속 중인 운동의 장으로 해석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