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서예미학을 이해하는
기본 사유
제1부는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예인식에 대해, 특히 ‘서예’라는 용어를 ‘마음의 그림[心畵]’이라고 이해한 것에 초점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일찍이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규정한 이는 한대 양웅(揚雄, BC 53~AD 18)이었다. 글씨 속에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다’는 이러한 사유는, 서예가 문자를 통한 단순한 의사소통과 지식전달의 도구라는 실용적 차원에서 벗어나 ‘마음을 그린 예술’이라는 차원으로 승화될 수 있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서예는 심법(心法), 심학(心學), 전심(傳心) 등으로 말해지기도 했다. 이 같은 서예인식은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예작품 속에서도 두루 확인되며, 이 책에서 저자가 심혈을 기울여 탐색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흔히 한국은 ‘서예’, 중국은 ‘서법(書法)’, 일본은 ‘서도(書道)’라는 용어를 써서 서예가 지향하는 점에 대한 차별점을 드러내곤 한다(조선조 유학자들의 문집을 보면, 이미 퇴계 이황(李滉)이 ‘서법’이 아닌 ‘서예’라는 용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한 것을 알 수 있다). ‘서도’는 ‘서예’를 도의 경지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기교와 법도 측면을 강조하는 ‘서법’과 차별성을 보인다.
문제는 ‘서예’라는 용어를 어떤 내용으로 규정하느냐다. ‘예(藝)’라는 글자의 의미 차원에서 본다면, 먼저 서예는 ‘문자를 운용하여 창작에 임할 때 요구되는 기예’를 뜻한다. 이때 서예는 서법과 상당히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네 서단에서 사용된 ‘서예’라는 용어는 이와 달리 서예의 ‘예술성’ 그 자체를 강조한다. 즉, 서예를 기교 차원에 국한시키지 않으면서 문인들이 지향한 고품격의 예술로 여긴다. 여기엔 기교 너머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철학적ㆍ심미적 차원이 더해져 있다. 저자는 이러한 토대 위에서 조선조 주요 서가(書家)들의 서예인식과 서예비평을 개괄하면서 서예가 추구해온 윤리적ㆍ경세적(經世的)ㆍ위기지학적(爲己之學的) 차원과 인문적 소양의 배양 측면까지 폭넓게 짚어나간다.
주자학과 서예미학 1
-이황의 상징성
제2부에서는 주자학이 조선조 유학자들의 서예미학에 끼친 영향을 다룬다.
이야기는 실질적으로 조선조 서예미학의 큰 틀을 제시한 퇴계 이황의 서예미학에서 출발한다. 특히 이황이 ‘지경(持敬)’을 바탕으로 삼아 서예미학을 전개하면서 ‘심화’ 차원의 서예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서법’이 아닌 ‘서예’라는 용어를 구체적으로 사용한 지점들에 주목한다. 이황의 서예인식은 주로 영남남인 계열에 속한 인물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조선조 서예미학의 한 ‘경향성’과 그 특징을 보여준다.
이황을 존숭했던 옥동 이서(李漵)는 한국서예사에서 최초로 체계적인 서예이론서인 『필결(筆訣)』을 집필한 이다. 그는 ‘역리(易理)’를 근간으로 한 서예철학을 통해 서예발생론과 관련된 형이상학을 전개해나갔다. 특히 유가경전의 문구를 서예에 적용하는 방식을 취하면서 전체적으로는 중화미학 차원의 서예미학을 논했다. 또 서통론(書統論) 차원에서 왕희지(王羲之)를 서성(書聖)으로 존숭하면서 ‘서예 벽이단(闢異端)’ 의식을 통한 서예비평을 전개했는데, 그 핵심은 전반적으로 당나라 때 손과정(孫過庭)의 『서보(書譜)』와 명나라 때 항목(項穆)의 『서법아언(書法雅言)』과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주자학의 이기론(理氣論), 성정론(性情論) 등과 같은 사유를 통해 서예를 이해했다는 점에서 항목과 차별된다. 이런 이서의 서풍에 대해 허전(許傳)은 동국진체(東國眞體)의 맥을 열어주었다고 평가한다.
영남남인 계통의 학맥을 이어받은 식산 이만부(李萬敷) 역시 이황을 추앙하고 이황이 제시한 서예미학을 추종했다. 저자는 이만부의 서예인식 가운데 왕희지 중심주의에 매몰된 차원에서의 조선조 서예가에 대한 평이 아닌, 그 자신의 눈으로 조선조 서예가를 평하며 서예사대주의에서 벗어나려 했던 점에 주목한다. 특히 이만부는 김생(金生), 황기로(黃耆老), 한호(韓濩), 양사언(楊士彦) 등 조선조 서예가들의 장점을 밝히면서 동시에 그들의 단점에 대해서도 그 연유를 밝혀 은연중 조선조 서예가가 중국 서예가에 못지않은 역량을 지녔음을 언급했다. 저자는 이만부의 이런 서예인식이 타자에 매몰되지 않는 주체적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데 하나의 방향성을 제시한다고 제언한다.
주자학과 서예미학 2
-어필과 추사
서예가 어떤 마음을 담아 표현하는가는 때론 국가를 다스리는 정치, 사람을 키우는 교육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조선조 제왕 가운데 이런 점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이가 바로 22대 국왕 정조(正祖)다. 정조는 주자학을 지배이데올로기 삼아, 당시 유행하던 백하 윤순(尹淳)의 ‘시체(時體)’ 풍 서체는 진기(眞氣)가 없다고 비판하면서, 온 나라 사람들이 윤순과 같은 사람의 필체를 따라 써서 참모습을 잃어버려 경박스럽다고 개탄했다. 또 개국 초 안평대군(安平大君)과 한호의 순정한 서풍으로 돌아갈 것[書體反正]을 촉구하면서 ‘심화’ 차원의 서예를 강조했다. 저자는 이렇게 정조가 글씨를 통해 당시 풍속을 진단한 것은 그만큼 글씨가 갖는 ‘심화’적 요소와 그 정치적 의미를 강조한 것이라 평가한다.
정조의 이 같은 서예인식은 구체적으로 ‘육녕육무설(六寧六毋說)’의 서예미학으로 특징지어진다. 육녕육무설은 노장 및 양명학적 사유와 관련 있는 부산(傅山)의 ‘사녕사무설(六寧六毋說)’과 차별화된 주자학적 서예이론이다. 정조는 송설체(松雪體)인 조맹부(趙孟頫) 서체를 숭상하면서 조선조 제왕 서풍의 정점을 이룬다.
전북 지역에서 간재 전우(田愚)의 학맥으로 통하는 유재 송기면(宋基冕)에 대해서는 ‘구체신용(舊體新用)’ 지향의 서예미학을 전개한 점에 초점을 맞춘다. 송기면은 흔히 전각이라고 일컫는 인장(印章)에도 관심을 보였는데, 기존의 조선조 유명 서예가들이 인장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은 점과 차별화된다.
주자학적 서예미학의 반경에서 그 정점은 서화(書畵)에서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담아낼 것을 강조한 추사 김정희(金正喜)로 삼았다. 서예의 청고고아(淸高古雅)함을 강조한 김정희는 “서예[書法]가 시품(詩品) 및 화수(畵髓)와 묘경(妙境)은 동일하다”라고 밝혀 서예의 예술성을 극대화시킨다. 한중서예사를 통관할 때 서예를 소기(小技) 차원이 아닌 ‘군자의 예술’로 승격시켜 기존의 서예인식과 차별화한 대표적 인물이 바로 그다. 저자는 여기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구별 짓기(Distinction)’ 개념을 끌어들여 ‘군자의 서화예술관’을 분석하는 데 적용함으로써 김정희 서예미학의 특징을 흥미롭게 재규명한다. 아울러 최근 중국 서단에서 ‘전ㆍ예ㆍ해ㆍ행ㆍ초’의 5체 외에 ‘합체자(合體字)’를 새로운 서체로 인정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는데, 이런 점을 이미 김정희가 ‘침계(梣溪)’를 합체자로 쓴 것을 통해 설명해낸다.
양명학ㆍ노장학과 서예미학
제3부에서는 양명학과 노장학이 서예미학에 끼친 영향을 다룬다.
한국서예사에서 동국진체의 가교였다고 평가받는 백하 윤순(尹淳)은 글씨에 진기(眞氣)를 통한 ‘창경발속(蒼勁發俗)’을 담아내고자 했다. 겉으로는 주자학의 중화 서풍을 보이지만, 마음속으로는 미불(米芾) 등 이른바 광기(狂氣) 서풍에 대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이같이 겉으로는 주자학이나 안으로는 양명학을 지향한 윤순 서예의 ‘외주내양(外朱內陽)’의 총체적 결과는 당시 시대를 풍미했던 ‘시체(時體)’로 나타났다. 앞서 언급했듯이, 정조는 이런 윤순의 서체를 도리어 ‘진기’가 없다고 문제시했는데, 저자는 조선조 서예미학을 이해할 땐, 정조의 윤순 비판처럼 예술성 이외의 정치ㆍ윤리ㆍ교육적 측면에 보다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서결(書訣)』을 지어 한국서예사에서 가장 정치한 서예이론을 펼친 원교 이광사(李匡師)는 당시 유행하는 서풍을 ‘연정기도(緣情棄道)’라는 사유를 통해 비판하면서 만호제력(萬毫齊力)의 운필법을 내세웠다. 이광사의 이 같은 이론은 이후 추사 김정희에 의해 혹독하게 비판당하는데, 이는 역설적으로 그만큼 이광사의 이론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아울러 양명학에 이해가 깊었던 그는 자연의 천기조화를 드러낼 것을 주장했고,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왕희지도 거부하겠다는 ‘심득신행(心得身行)’의 주체적 서예정신을 발휘했다. 저자는 이광사의 서예미학을 분석하면서 무엇보다 그 정신을 한국의 전통적 미의식과 연계하여 어떠한 긍정성이 있는지 규명하는 데 집중한다.
창암 이삼만(李三晩)은 한국서예사에서는 매우 드물게 노장(老壯)의 우졸(愚拙)철학을 자신의 서예창작에 적용하여 광기어린 서풍을 보인 인물이다. 저자는 그의 창작을 광견(狂狷) 서풍과 행운유수체(行雲流水體) 및 우졸통령(愚拙通靈) 풍 지향의 서예미학이란 두 가지 관점에서 분석해낸다. 노장의 우졸철학에 기반한 서예창작 경향은 중국서예사에서도 좀처럼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서예 정체성의 진로
보론은 양명학과 노장학을 통해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모색해보기 위한 제언으로 꾸려진다.
저자는 남아 있는 자료들로 한국서예의 정체성을 규명할 때, 두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하나는 주로 비학(碑學)이나 금석문 서예에서 보이는 부정형성, 무작위성의 차원이다. 이는 한국미의 특질로 말해지는 자연미와 유사한데, 다만 이런 분석이 한국서예사의 중심을 이루는 첩학(帖學) 측면에서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것을 여전한 한계로 지적한다.
또 다른 차원은 견고한 왕희지 추앙에 근거하는, 유가의 중화미학적 틀에서 논의되는 한국서예의 정체성에 대한 규명이다. 먼저 저자는 이렇게 문제의식을 설정한다. “왕희지 중심주의의 핵심에 해당하는 중화미학과 서예정신이 갖는 장점은 많다. 중화미학은 항목이 『서법아언』에서 말하는 서예의 ‘삼요(三要)’에 해당하는 청(淸), 정(整), 온(溫), 윤(潤), 한(閑), 아(雅)와 같은 우아미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희지 중심주의와 중화미학만 강조하는 경우, 개개인의 순수하면서도 주체적인 예술적 감수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특히 문자의 가독성이란 점에서 출발한 서예에서는 이런 점이 더욱 배가된다. 한국서예 정체성을 규명하는 데 이 같은 왕희지 중심주의는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저자는 한국서예가들이 중국서예가들과 어떤 차별상을 보였는가에 대한 정치한 분석을 통해, ‘고아(古雅)한 예술 측면으로서 한국서예미의 특질과 정체성’을 밝힐 필요가 있음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왕희지의 서예와 같으면서도 ‘다른 점’이 무엇인가 하는 지점들이다. 보건대 그 ‘다른 점’에 한국인의 심성과 미의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특히 ‘편(偏, 경향성)’에 담긴 서예를 기교의 공졸(工拙)이나 미의 우열(愚劣)만 기준 삼아 평가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천진스러움과 천기(天機)를 담아낸 서체로써, 즉 자신의 마음과 감성을 자유롭게 담아내는 방식을 통해 어떻게 표현해내는지 심도 있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서예사에 중화중심주의ㆍ왕희지중심주의가 만연한 현실을 자각하면서도, 김생의 탈(脫)왕희지중심주의에 주목하고, 조선 풍에 대한 재인식과 더불어 양명학에 입각해 서예창작에 임했던 이광사, 노장학에 입각해 서예창작에 임했던 이삼만 등에 주목하면서 ‘우리들의 눈’을 재삼 강조하는 이유 또한 같은 맥락에서 비롯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