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우리말 번역에 대하여
우리는 110여 년에 이르는 우리말 번역의 역사를 가진 『사회계약론』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낭비가 되지 않도록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일단, 풍부한 옮긴이 주를 제공하려고 했다. 『사회계약론』은 어떤 의미에서 우리와 다른 세계의 책이다. 우리는 번역이 아무리 정확해도 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는 텍스트만으로 부족하다고 판단했다. 루소가 텍스트 곳곳에서 전제하는 맥락과 배경은 적절한 해설 없이 인지되지 않는데, 이 경우 독자는 『사회계약론』이 얼마나 다층적이고 논쟁적인 텍스트인지 알 수 없다. 또한 몇몇 개념이나 표현들은 시대적인 차이나 개념의 변천으로 인해 현대 독자들에게 오독을 일으키곤 한다.
이런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우리는 너무 의존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18세기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사전』과 특히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백과사전』을 풍부하게 인용했다. 계몽주의 시대 프랑스 사회와 사상에 대한 한국어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18세기 프랑스어와 지식을 총망라하는 두 저작을 참고하고 소개하는 것이 독자를 『사회계약론』의 세계로 안내하고, 오해를 일으킬 만한 표현들의 정확한 의미를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soci?t? civile’은 ‘시민사회’로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백과사전』의 정의를 통해 이 표현의 강한 국가주의적 함의를 부각시킬 수 있었다.
또한 루소가 암시하거나 참고하고 있는 고전 텍스트와 17~ 18세기의 저작들을 최대한 인용하려고 했다. 이것은 『사회계약론』이 위치하는 더 작은 세계, 그러니까 이 책이 직접 참고하고 대적하고 있는 사유와 논증의 지형으로 독자를 안내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홉스Thomas Hobbes나 로크John Locke는 물론이고 여전히 한국에 거의 소개되어 있지 않은 그로티우스Hugo Grotius나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 등 자연법 사상가들의 텍스트가 『사회계약론』과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부족하지만 독자가 직접 확인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이런 기본적인 해설과 함께 『사회계약론』의 이해를 위해 필수적인 또 다른 맥락을 염두에 두었다. 그것은 루소의 전체 사유의 관점에서 읽은 『사회계약론』의 의미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일단락된 루소 사유의 체계화 작업이 한국에서는 여전히 기초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신 엘로이즈』는 불어불문학과에서, 『에밀』은 교육학과에서, 『사회계약론』은 정치학과에서 따로 독서된다. 루소 철학의 토대인 『불평등기원론』은 어떤 곳에서도 엄밀하게 읽지 않는다. 이런 분위기는 루소에 대한 체계적인 이해를 막을 뿐만 아니라, 각 텍스트에 대한 정교한 분석에도 방해가 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옮긴이 주 곳곳과 해제에서 해석에 도움이 될 루소의 다른 텍스트와 참고 사항을 덧붙였으며, 루소 체계와 『사회계약론』 연구의 역사에 대한 단서를 조금이나마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여기에는 『사회계약론』 이해에 필수적인 『제네바원고』Manuscrit de Gen?ve도 포함된다.
20세기 중반 이후 비교적 최근 연구에 담겨 있는 『사회계약론』에 대한 해석도, 텍스트 이해에 필요하다면 적극적으로 소개했다. 드라테가 제공하는 기본적인 정보는 물론이고, 알튀세르Louis Althusser나 필로넝코Alexis Philonenko 등은 쉽게 파악되지 않는 텍스트의 구조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많은 주석의 양과 특정한 선택들은 무엇보다 다음 목적을 위해 필요했다. 이 목적이란, 『사회계약론』을 그것이 속한 시대와 사유 체계 그리고 정교한 해석의 역사 안에 정확하게 위치시킴으로써 텍스트가 일차적으로 표명한 의미와 이념을 부각시키는 일이었다. 독자들은 옮긴이 주와 해제에서 『사회계약론』에 대한 일종의 비관주의적 해석과 함께, 책의 현대적 의미를 말하기는커녕 어떤 의미에서 이 책이 과거의 것임을 강조하는 논평들을 종종 접하게 될 것이다. 물론 독자들에게 특정한 해석을 강요할 의도는 전혀 없다. 또한 『사회계약론』이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는 책임을 증명하기 위해 긴 시간 작업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이 책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했던 특수한 의미 체계를, 그리고 역설적으로 『사회계약론』을 끊임없이 새로운 책으로 변환시켰던 특수한 과거지향성을 강조하고 싶었다.
책을 고루하게 만들 뜻이 없다는 사실은 번역어에 대한 우리의 선택에서도 드러난다. 기본적으로, 옮긴이 주를 통해 번역의 어려움을 일으키는 언어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문제를 자세히 기술하려고 했다. 이것은 번역자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이 아니고, 핵심적인 개념의 번역 문제를 공유하는 것이 한국어 사용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를 진전시키도록 돕는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권 앞부분에는 어쩔 수 없이 긴 주석을 달아야 했다. 여기에서 설명한 ‘droit’나 ‘civil’ 등의 번역에 대한 고민이 당대 텍스트에서 이 단어들의 풍부한 함의와 함께 독자에게 잘 전달되었길 바란다. 우리는 몇몇 어휘를 기존과 달리 과감하게 번역하기도 했다. 상반되는 결합방식을 지시하는 ‘agr?gation’이나 ‘association’과 같은 경우(1권 5장)에는 최근 루소를 비롯한 계몽주의 연구의 관심사인 자연과학적 사유와의 연관성을 반영하여 화학 개념과 통용되는 ‘응집’, ‘회합’을 선택하기도 했으며, 『사회계약론』의 유명한 개념인 ‘religion civile’과 같은 경우(4권 8장)에는 이 책에서 ‘civile’이 가진 함축과 ‘religion civile’과 ‘religion du citoyen’의 구별을 근거로, 기존의 번역어인 ‘시민종교’를 ‘정치종교’라는 더 분명한 어휘로 교체하기도 했다. 물론 우리의 선택은 여러 비판에 열려 있으며 몇몇 경우 언젠가 철회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최근의 연구 경향 혹은 개념적 이해의 교정에 기초한 번역어 교체가 『사회계약론』에 대한 새로운 토론의 계기가 되길 바란다.
내 삶이 얼마나 비천했든 왕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 잘 생각했다면
내 영혼의 역사는 왕의 그것보다 더 흥미로운 것이다.
……
어떤 것에 대한 경험과 관찰의 측면에서 나는 아마 어떤 인간도 가져 본 적 없는 가장 유리한 입장에 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은 어떤 지위도 없이 모든 신분을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왕위만 제외하면 가장 낮은 신분부터 가장 높은 신분까지 모든 것을 살아 보았노라.
_장-자크 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