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과 번뇌를 단박에 끊어내는
반야의 지혜를 담은 최고의 경전 《금강경》
《금강경》은 금강석같이 예리하고 단단하면서도 빛나는 부처님의 지혜를 담은 경전 중의 경전이다. 본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경》로, ‘반야바라밀’은 분별과 집착이 끊어진 완전한 지혜인 ‘반야’를 성취했다는 의미이며 진리의 근본이다.
불교 경전 《금강경》의 영어 번역은 《다이아몬드경(Diamond Sutra)》이다.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빛나는 보석인 금강석(다이아몬드)은 금강석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도 깰 수 없다. 깨달음에 도달하는 반야 지혜는 금강석과 같아, 세상 그 무엇도 대적할 수 없다. 우리네 중생의 욕심과 번뇌와 어리석음이 아무리 강하고 질기다 해도 금강석 같은 반야의 지혜를 수행한다면 단박에 끊어낼 수 있다는 의미다.
어떤 학자는 “《금강경》은 종교적 색채를 갖지 않으면서 모든 종교를 다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위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그러나 《금강경》은 결코 이해하기 쉬운 경전이 아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많은 주석서가 뒤따랐고, 오늘날까지 동서양 학자들이 가장 깊이 연구하는 종교 철학서가 되었다.
석가모니 부처가 열반에 든 몇 개월 후(BC. 6세기경)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정리하고 기록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당시에는 전통적으로 성현의 가르침을 구술과 암송으로 계승했다. 그러나 저마다 기억에 의존해 전하는 말들이 마치 부처님의 원래 설법인 양 주장할 우려가 있어, 정확히 기록해 후세에 전하자는 뜻으로 경전 작업이 시작되었다.
대승불교의 주요 경전 중 하나인 반야부 경전은 기원전 백 년경에서 기원후 천이백여 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에 걸쳐 서서히 완성되었다. 오랜 역사를 거치며 내용이 첨삭되고 여러 주석(해설)이 붙었으며, 여러 학자가 손질을 가해서 대승 경전 가운데 가장 방대한 규모를 갖추었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와 한문으로 번역한 《대반야바라밀다경》이 대표적인 반야부 경전인데, 무려 육백여 권이 넘는다. 다른 번역까지 합하면 반야부는 팔백여 권에 달하고, 경전이 많으니 해설서 또한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금강경》은 바로 이 반야부 경전 가운데 오백칠십칠 권째 경전으로, 방대한 반야부 중 하나일 뿐이지만 대승불교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금강경》의 한역 번역본은 오늘날까지 구마라집 번역이 가장 많이 읽히고 통용되어 왔다. 이 책에 소개된 《금강경》도 구마라집 번역본인데, 전체 32분(分, 이 책에서는 32장)으로 나뉘었고 각 분마다 소제목이 달려 있다. 우리나라의 《금강경》 주석서는 신라 때 원효의 《금강반야경소》가 있었으나 지금은 전해지지 않고, 조선 초기 함허 득통이 쓴 《금강경 오가해설의》가 가장 유명하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지혜를 전하는
《금강경》의 역사와 전승
《금강경》은 반야 지혜를 체득하고 진리를 꿰뚫어 본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을 담아 놓은 보물창고와 같다. 석가모니는 약 이천 육백여 년 전, 인도 북부 네팔 지역의 작은 나라 카필라국의 룸비니 동산에서 태어났다. 모든 것을 이룬다는 뜻의 ‘싯다르타’라는 이름의 태자는 태어나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에 이어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즉 온 우주에서 오직 내가 가장 존귀하다. 세상에 있는 모든 괴로움을 내가 마땅히 다 편안하게 하겠다.”라는 뜻이다. ‘유아독존’에서 ‘나’란 싯다르타 개인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존재이자, 누구나 본래 지닌 존귀한 본성인 ‘참나’를 뜻한다. 세상의 모든 고통과 괴로움을 누구나 지닌 참나의 힘으로 해결해 온 세상을 평안하게 하겠다는 자비로운 서원이다.
이렇듯 이고득락(離苦得樂), 즉 “고통의 바다를 벗어나 누구나 해탈과 안락을 누릴 수 있다.”라고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선언했다. 모든 인류를 고통에서 행복으로 이끌겠다는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를 전하며 태어난 싯다르타는 생로병사와 같은 삶의 궁극 문제를 해결하고자 화려하고 안락한 왕실을 버리고 고독한 수행자의 길을 걷는다. 마침내 삼십오 세의 나이에 가장 높고 바른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어 붓다가 되었다.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뜻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대중에게 전하고자 처음에 화엄학을 설법한다. 하지만 불교의 결론이라 할 법한 최고 수준의 화엄학을 알아듣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수준별로 다시 접근해 대기설법(對機說法, 대상의 성향이나 능력에 맞게 달리 가르침)했는데, 아함부, 방등부, 반야부, 법화부, 화엄부가 그 순서이다. 《금강경》도 고등부 자격이라 할 수 있는 반야부 육백부 경전 가운데 하나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우주의 만물은 오직 마음이 만든다)라는 진리이다.
부처님 사후 불교 교단은 많은 부파가 난립하며 서로 다른 주장과 해석이 거세게 일어나 분열되었다. 기득권 세력은 문자와 자구를 중심으로 한 불교 해석에 주로 매달렸고 불교는 점점 대중과 멀어지고 말았다. 이런 혼란한 분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대승불교가 등장한다. 이전에는 오직 부처님의 가르침만 추종하려 했으나 대승불교는 수행자 모두가 부처라는 사상을 퍼뜨렸다. 대승(大乘)이란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함께 가는 큰 수레라는 뜻이다. 대중불교 시대에 걸맞게 승가에서도 대승불교를 추구했고, 개인 중심의 수행을 중시하는 기존 불교를 혼자 타고 가는 작은 수레에 비유해 소승(小乘)이라 했다. 대승불교는 나와 남을 함께 위하는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정신에 기초해, 개인의 성불 이전에 고통받는 중생을 먼저 구제하는 보살(깨달은 중생) 사상을 강조했고 ‘보살도’라는 새로운 수행상을 정립했다. 《금강경》 역시 이러한 대승 보살도에 입각해 탄생한 경전이다. 오랜 역사와 여러 시대를 거쳐 오면서 《금강경》은 대승불교 수행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경전이 되었다. 화엄종의 《화엄경》, 정토종의 《무량수경》처럼 각 종파마다 각자 근본으로 삼는 경전(소의경전)이 있는데, 우리나라 조계종은 《금강경》을 《육조단경》과 더불어 소의경전으로 삼고 있다.
《금강경》이 인도에서 들여와 처음 한자로 번역될 때는 구분 없이 죽 이어진 한편의 글이었다고 한다. 나중에 양나라 무제의 아들 소명태자가 작은 단락으로 나누고 소제목을 달아 지금과 같은 구성이 되었다. 《금강경》 원본은 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 사이에 쓰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불교 전래기에 들어온 것으로 본다. 고려 때 보조국사 지눌은 불법을 배우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반드시 《금강경》을 읽도록 했기 때문에, 그 이후로 우리나라에 《금강경》이 널리 유통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구마라집 번역본이 주로 읽히고 있다. 인도 승려 구마라집은 중국에 들어와 수많은 불경을 한문으로 번역해 중국 전역에 불법을 확산시키는 데 크게 공헌한 인물이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금강경》은 조선 시대에 한글 창제 이후 《언해본 금강경》이 있었다고는 하나 전해지지 않았다. 근대에 들어와 만들어진 《한글본 금강경》이 남아 있는데, 3·1 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과 함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가하며 독립을 위해 헌신한 용성스님이 처음 한글로 번역한 것이다.
편견을 버리고 진리를 함께 나누는 법보시와
실천행을 중시하는 《금강경》의 현재성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어떤 정해진 모습(相)이 따로 있지 않고 시시각각 계속 변하고 달라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떤 상(相)을 가지고 세상을 편견과 고정관념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늘 문제가 생긴다. 세상만사는 고정된 상이 없음을 깨닫는 무상(無相)은 《금강경》에서 가장 중요한 종지(宗旨, 근본 요지)다.
《금강경》에서 수보리는 수행과 깨달음에 관해 부처님과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이다. 대승불교에서는 수보리를 부처님의 제자들 가운데 ‘공(空)의 이치를 가장 잘 이해했다.’라는 뜻으로 ‘해공 제일(解空第一)’이라 한다. 그의 어릴 때 이름이 공생(空生)이었다는 점도 주목된다. 《금강경》은 공 사상을 대표하는 경전인데, 《금강경》의 주인공 수보리가 해공 제일이라는 것 또한 의미심장하다.
《금강경》은 우리 생각이 이분법적 고정관념을 벗어나 말로 전할 수 없는 살아 있는 깨달음을 체득하도록 가르친다. 그리고 선악 시비 장단 미추 같은 이분법의 세계에서 어느 한 극단으로 정답을 고정하는 어리석음을 경계한다. 중도의 눈으로 실상을 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법도 버려야 할 것을,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라고 말하며 법이든 비법이든 그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했다. 어떤 법이나 경전도 뗏목과 같아서 쓸모를 다하면 버리고 가야 한다.
그래서 선가(禪家)에서는 사교입선(捨敎入禪)을 추구한다. 경전을 배우고 나면 문자의 가르침은 뗏목과 같으니 버리고 참선(參禪) 수행을 통해 실천하라는 뜻이다. ‘경전은 부처님의 말씀이고, 참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부처님의 마음을 전하기 위한 방편이다. 방편을 목적으로 보면 강을 건넜는데도 뗏목을 지고 가는 꼴이다. 참선은 내 마음을 깨닫는 실천 수행이다. 《금강경》 자체는 글로 된 경전이지만 그 내용은 실천 수행을 요구한다. 경전은 실천을 위한 뗏목일 따름이다. 육바라밀을 수행하는 대승 보살의 거룩한 공덕으로 인간 세계는 진흙탕 속에서도 연꽃을 피워낼 수 있다. 《금강경》을 혼자서 독송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뜻을 이웃과 나누면서 괴로운 인간 세계를 연꽃 향기 가득한 아름다운 세상으로 바꾸려는 아름다운 이타행의 길을 가야 한다. 반야의 눈인 혜안이 열리면 모든 것을 벗어나면서 동시에 모든 것을 아우르는 중도를 이룰 수 있고, 생사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부처의 깨달음이 곧 반야 바라밀이며 영원한 자유의 길이다. 스스로 편견의 세계를 벗어나 우주 만물의 본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는 깨달음의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수행은 지금 이 시대에도 우리의 내면을 지키는 힘이 된다. 여전히 우리는 《금강경》을 통해, 이 어지러운 세상에서 우리를 이끌어 줄 빛나고 단단한 지혜를 만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