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연의 죽음에 허락되지 않은 슬픔들
“지금 이 순간, 애도는 나의 몫이다”
저자가 처음 이 일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20년이었다. 월급 노동자가 되고 싶어서 일자리를 알아보다가 나눔과나눔에 지원했고, 그때부터 계속 무연고사망자의 장례를 지원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무연고사망자. 연고 없이 죽은 사람. 이 단어에 ‘세상에 연고 없는 사람도 있나?’라는 생각을 할지도, 자신은 이 단어와 전혀 관련이 없다고 단정 지을지도 모르겠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라면 살아가면서 인연을 맺고 사는 사람 한 명쯤은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연고사망자는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이 사회의 법에 의해 ‘분류’된다.
저자는 그렇게 사회 제도라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무연고로 보건 위생상 처리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무연의 죽음에는 애도조차 허락되지 않는 상황들을 목도하며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몫은 애도하는 일이라고.
‘위패에 적힌 이름은 생전에 어떻게 불렸을까?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고인의 이름을 부르는 걸까?’
……장례에 참여한 사별자가 없었다. 이 순간 애도는 나의 몫이다. 그리고 카트에 놓인 관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뒤돌아 걸으며 생각했다.
‘고인의 이름이 불릴 때 어떤 마음이 담겨 있든, 내 일은 애도하는 것이다.’ (222,223쪽)
‘무연고’라고 이름 붙인 사회,
애도할 수 없는 이 시대의 비통한 현실
무연고사망자라고 해서 무조건 연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연고가 있어도 무연고자로 처리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동생을 무연고로 보낼 수 없어서 어떻게든 장례를 치르려고 했어요. 근데…… 사망진단서를 발급해 줄 수 없대요. 의료법인지 뭔지 말도 안 되는 이유 때문에 맏형인 제가 동생의 장례를 치를 수가 없어요.” (83쪽)
동생이 죽었지만 장례를 치러 주지 못하는 한 남자의 절규는, 우리나라에서 애도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우리나라의 장사법상 연고자는 배우자, 직계존속·비속, 형제자매이고, 이외의 사람은 시신 인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장례를 치르지 못한다. 그런데 위의 경우처럼 동생이 죽어도 장례를 치르지 못할 수 있다. 의료법상 사망진단서를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직계존속·비속이 없는 경우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고인의 자녀가 시신 위임을 하고 연락을 거부하면, 아무리 형제라 해도 장례를 치를 수가 없는 것이다.
1인 가구, 비혼 가구, 동거 가족, 살림 공동체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생기고 있다. 하지만 가족의 형태가 달라져도 우리나라 장사법은 그에 맞게 대응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런 현실을 반영해 2020년 보건복지부에서는 ‘가족 대신 장례’가 가능하도록 지침을 내렸으나 사실상 현실적인 방안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왜냐하면 이 제도 역시 고인이 무연고사망자로 확정된 이후에나 가능하고, 그렇게 되기까지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무연고사망자는 2019년 2,656명, 2020년 3,137명, 2021년 3,573명으로 늘어가는 추세다. 앞으로는 매해 최대치의 기록을 경신할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무연고’로 이름 붙이며 떠나보내야 할까. 아직도 이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까?
우리는 모두 애도할 권리, 애도받을 권리가 있다!
마지막 순간만큼은 차별 없는 세상을 위하여
애도하는 것이 자신의 일이라 고백하는 저자. 그러나 이 책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그가 단순히 일로써 대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온전히 느낄 수 있다.
나는 아주 가끔…… 인신매매범과 가정폭력범, 성범죄자의 장례를 치렀다. 그들의 위패 앞에서 묵념하고 애도했다. 누군가 그 애도가 진심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진심으로 애도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대답할 것이다. 솔직히 그렇게 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끊임없이 마음속으로 변명해야 했다.
‘애도받을 권리는 인권이고, 여기에 차등이 있어선 안 된다. 고인을 애도하는 것은 결코 그의 과거를 옹호하거나 용서해서가 아니다.’ (229쪽)
저자는 장례를 치르면서 고인과 사별자 들을 만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도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 서서 침잠했다. 때로 괴롭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가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은 애도가 ‘인권’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애도가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을 사회에서 구분 짓지 않는 날이 오면 좋겠다. 그래서 적어도 지인이 죽었을 때 마음껏 슬퍼할 수 있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했을 때 불안하지 않는 사회가 되기를 꿈꾼다. 자신의 역할이 없어질 날을 위해 일한다는 저자의 소망처럼, 애도하고 애도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로 여겨지고 사람들이 마땅히 그 권리를 누리며 살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