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글자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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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의 기적을 미술사적으로 읽기
『삼국유사三國遺事』의 저자 보각국사普覺國師 일연一然, 1206~1289 스님은 본문에 해당하는 첫 장의 제목을 ‘기이紀異’로 하였다. 그리고 “성인은 예악禮樂으로 나라를 일으키고 인의仁義로 가르침을 베푸는 데 있어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언뜻 일연 스님 스스로 역사 서술에 있어 객관성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 같은 역사서가 객관적인 사실만 다루고 있는 것과 차별화하여, 사실은 이 괴력난신, 즉 기이한 일을 자신의 저서 첫 머리에서부터 다루게 될 것을 두고 미리 양해를 구한 것이다. 첫 장 ‘기이’는 ‘괴이하다’는 의미의 ‘기이奇異’와 표현은 다소 다르지만, 본문에서는 이미 “삼국의 시조가 모두 신이神異에서 나타난 것이 어찌 괴이하다 하겠는가”라고 하여 이러한 기적적인 사실을 역사 서술에서 결코 배제할 수 없음을 역설하고 있다. 그래서 책의 제목을 ‘사史’가 아닌 ‘사事’로 붙였으리라.
공식적으로는 『삼국유사』를 영어로 표기할 때 Memorabilia of Three Kingdoms라고 한다. 『삼국사기』와 구분해 History로 하지 않은 것은 맞지만, memorabilia가 ‘기억할 만한 일’, ‘주요 기사’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을 보면 일연 스님의 원래 의도를 완전히 전해 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유사遺事’, 즉 남겨진 이야기는 어쩌면 이렇게 기이한 일이어서 『삼국사기』에 실리지 못한 이야기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차라리 신화가 된 이야기, 전설이 된 이야기라는 뜻으로 Legend of Three Kingdoms라고 하는 것이 더 쉽고 잘 어울리는 듯하다. 일연 스님은 이러한 괴이한 일 가운데 진실, 특히 불교적 진실이 담겨 있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신화는 흔히 허황되게 지어 낸 이야기로 간주된다. 하지만 근대 이후 신화에 담긴 관념이 고대인의 정신세계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로 각광받은 것을 생각하면, 일연 스님의 이러한 설명은 마치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나 클로드레비스트로스Claude Levi-Strauss 같은 신화 연구자의 한 문장을 보는 것처럼 현대적으로 들린다.
이 책에서는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사건에 담겨 있는 진실을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해보고자 했다. 즉, 그저 오래 전 황당한 이야기가 아니라 일연 스님이 생각했던 대로 그 전설 속 에 어떤 진실이 숨겨져 있다고 보는 시각에서 접근해보고자 한 것이다. 당시 일어났던 기적 같은 일은 마치 영화 〈광대들: 풍문조작단〉(2019)에서처럼 정치적인 의도로 조작된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단순한 자연현상이거나 우연에 불과한 일이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신비로운 의미를 덧붙여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실제 그러한 기적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것을 당시에, 혹은 이후에 중요한 사건으로 기록하기는 매우 어렵다.
지금도 종종 UFO가 나타났다거나 귀신이 사진에 찍혔다거나 하는, 정상적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사건이 보도된다. 그뿐인가. 정치적 네거티브 공방을 위해서는 있던 일도 없어지고 없던 일도 있던 일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이 실제 있었는가 없었는가가 아니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소문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본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렇게 작은, 그러나 퍼져나가기 쉬운 이야기는 누군가의 당락當落을 결정하기도 하고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며 혁명을 촉발하기도 한다.
불경이나 성서, 혹은 그리스 신화는 워낙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건의 인과관계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저 대의만 기록할 뿐이다. 나의 아버지는 기적에 대해 평소 이렇게 설명하셨다. 시작과 끝만 있고 그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것이 기적이고 마술이라고. 종교 경전이 그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는 까닭도 그래서가 아닐까? 그래서 그 축약되고 함축된 기록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 과정을 상상할 필요가 있다. 물론 종교적인 시각에서는 합리적인 해석보다 있는 그대로를 기적으로 받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당연히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세상에는 인과관계로 이루어진 과학 현상이라고 할지라도 그 것을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한 기적이라고밖에 간주할 수 없는 일이 무수히 많다. 또 인간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실제로 세상에는 얼마든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은 그저 『삼국유사』의 신비로운 이야기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라거나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과거에 일어났던 어떤 사건을 역사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사건이 실제 무엇이었는가보다 그 사건을 당시 사람들이 어떻게 보고자 했는가가 더 중요할 수도 있음을 말 하는 것이다. 실제 어떤 사건이 일어났는가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실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기 때문에, 역사는 어쩌면 실제가 아니라 그 실제가 일으킨 파장을 살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미술사학자로서 신비로운 사건의 흔적이 담긴 유적과 유물을 만날 때마다 그에 얽힌 전설 같은 이야기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 학문적으로는 그런 이야기는 배제하고 시작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의문을 항상 품어왔다. 예를 들어 많은 군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파티마의 성모를 재현한 조각상을 연구하면서 그 설화를 배제하고 순수하게 시각미술로만 다룰 수 있을까? 지금의 우리 눈에는 어설픈 컴퓨터 그래픽 효과처럼 보일지라도, 과거 작가는 당시 기적으로 인한 감동과 충격을 최대한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필자에게는 사건 자체보다 작품에 담긴 화석화된 당대인의 충격이 더 객관적으로 다가온다.
원래 미술사라는 학문이 감성을 이성으로 번안해 독자에게 제시하는 일인 지라, 신화를 역사로 번안하는 작업과도 상당히 닮아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글쓰기가 가능했다. 화석화된 옛 사람들의 감탄과 충격을 끄집어내어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이 책에서 필자가 펼친 상상은 때로는 주관적인 추측에 불과할 수 있다. 다만 그저 보다 합리적인 설명이 나오기 전까지 하나의 가설로 간주해주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