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카르마는 나의 책임이다
우리가 한 생을 살고 그 생에서 미처 못다 한 배움을 위해 다음 생을 설계할 때, 밑그림이 되는 것이 소위 ‘카르마Karma’라고 한다. 카르마는 한자어로 업業이라 쓰며, 산스크리트어로는 ‘행위’라는 뜻으로,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빚어진 인과因果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요가난다는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모든 상황과 인물과 습관 등이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이용해 빚어놓은 결과물이라고 말한다. 사람이 살면서 겪는 문제들의 깊은 뿌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잠재의식에 박혀있으며, 각자 자신이 빚은 카르마가 끌어당기는 힘을 통해 불러들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에 대해 변명하거나 누군가를 탓하는 태도는 자기 책임을 회피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요가난다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과 스스로를 책망하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아무도, 자기 자신조차도 비난하지 말라. 비난과 책망으로는 이미 일어난 일을 지울 수 없다. 오히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환경에 더욱 의존하게 될 뿐이다. 내면의 침묵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라. 자기 앞에 있는 것과 화해하고 그와 관련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 당신은 모든 카르마를 다시 만들 수 있고, 당장 오늘부터 영혼 의식(soul-consciousness)으로 새롭게 살 준비를 갖출 수 있다. 에고의 명령에 불복하라. 그것들은 영원한 미몽에 뿌리를 내린 것들이다.”(p.30)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는 기나긴 환생의 여정과 물질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방랑이 끝나면, 언젠가는 기쁨으로만 가득한 하느님 곁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혼에게 영원한 형벌이란 가당치 않다. 카르마를 짓는 것도 자기 자신이지만, 그것을 풀고 새로운 카르마를 지을 수 있는 것도 자기 자신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진정한 책임이 시작되는 것이니, 결국 ‘나의 카르마는 나의 책임’이라는 말은 그 뜻이라고 볼 수 있다.
죽음과 환생의 쳇바퀴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법
하느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라는 선물을 주셨고, 우리는 그것을 활용해 자신과 삶을 완성해간다. 나무나 돌과 다르게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갈 수 있다. 그 자유의지의 시작과 끝이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소수의 현자에 불과하지만, 그럼에도 그 사이에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인간의 몫이라고 요가난다는 말한다.
“물에 빠져 죽어가는 사람이 공기를 갈망하듯 해방을 갈망해야 한다. 뜨거운 갈망 없이는 결코 하느님을 찾지 못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을 갈망하라. 모든 것을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도록 그분만을 갈망하라. 이것을 무엇보다도 큰 목마름으로 여기라. 그러면서 동시에 기쁨과 슬픔, 쾌락과 고통, 질병과 건강 등 모든 이원二元을 초월하라. 다른 모든 것과 다른 모든 사람들로부터 동떨어진 존재라는 착각에서 스스로를 해방하라. 오로지 그분께만 마음을 쏟으라. 당신이 되고픈,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고 흔들림 없는 옹근 영(Spirit)으로 머무르라. 그분만이 당신의 참 자아다. 그분의 지복至福만이 당신의 참 본성이다.”(p.105)
요가난다는 빈틈없이 작용하는 우주의 법칙과, 그로 인한 죽음과 환생이라는 판결을 피하려면 오직 신성한 의식 안에서, 내면에 거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조율하며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신성神性이야말로 이 모든 우주 법칙 위에 있으며, 신성에 가까워질수록 하느님의 법에 위배되는 일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삶의 첫 자리에 하느님을 모시고 매 순간 그분을 향해 깨어있다면 자신이 감당해야 할 카르마와 창조해야 할 카르마를 분별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모든 카르마의 영향력, 이 모든 죽음과 환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라고 말한다. 그 의식의 빛이 결국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 나뿐만 아니라 우주만물에 해방을 안겨줄 지도 모른다는 나직한 속삭임은 이 계절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묵상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