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세종대의 경이적인 업적을 특히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의 관점에서 검토했다. 세종대의 연구에는 세 가지 편향이 존재한다. 첫째, 일국적 관점이다. 한국의 시야에서만 이해하려는 것이다. 둘째, 민족적 관점이다. 과도하게 미화하려는 것이다. 셋째, 문화적 관점이다. 정치보다 문화적 이해에 치우친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책은 세계사, 비교사, 정치사의 관점을 취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종대의 업적은 13-14세기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의 ‘제1차 세계화’(the first globalization)에 의존하고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결과 유럽과 아랍, 중앙아시아, 중국문명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융합되었다. 13세기 중엽 수많은 고려인이 세계체험을 겪었다. 그 결과 국가혁신의 사상과 운동이 배태되어, 조선건국으로 귀결되었다. 세종은 고려에 유입된 자양분을 소화하여,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국가혁신에 착수했다.
한국 역사에서 세종대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한국다운 문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의 국가는 중국문명에 압도당해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다. 세종대의 최만리 역시 한글 창제가 중화를 버리고 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연은 조선의 향악을 중국의 아악으로서 교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향악을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중국 음악이론을 집성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깊이 이해한 뒤의 결론이었다.
세종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 분야를 원리적으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맹목적으로 추수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융합할 수 있었다. 고유문명과 세계문명을 융합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한국 역사상 세종대가 처음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표준이 완성되고, 조선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한국전통의 오리진이다.
세종 시대의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은 한국 역사에서 가장 경이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12-14세기 송ㆍ원(宋元)에서 꽃핀 제1차 세계화의 아름다운 열매였다. 그리고 그 지적 토대는 송의 성리학이었다. 팍스 몽골리카 하에서 고려인들은 몽골제국이 성취한 유례없이 풍부하고 심오한 문명적 성취를 흡수할 수 있었다. 그를 토대로 14세기 말 유교국가를 새롭게 수립했다. 또한 세종대에는 고유문명과 세계문명을 종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의 전통을 창조했다. 그 시대에 만들어진 한글은 500여 년이 지나서야 가치가 인식될 정도로 현대적이었다.
32년간 이루어진 세종의 업적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지만, 그의 모든 정치는 사실 애민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의 초인적인 업적은 단 하나, 백성을 하늘이 낳은 사람(天民)으로 섬기고 보살펴, 그들이 사람 사는 즐거움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세종은 “정치가 얼마나 인간의 눈물을 닦아주고 위로할 수 있는가?”를 생각한 정치가였다. 세종은 조선다움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다움을 창조한 인물이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세종만의 독특한 특징이 존재한다.
첫째, 세종의 학문이 철저하게 치용(致用)과 세용(世用), 즉 실용주의의 관점에 서 있다. 성리학자들은 이 문제를 심학적으로 생각했다. 예컨대 조광조는 “치란은 나의 도(道)와 심(心)이 진실한가, 진실하지 못한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세종의 학문관은 이런 심학적(心學的)인 유교와 긴장이 존재했다.
둘째, 세종은 듣기와 포용에 뛰어났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것이라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 과감히 수용했다. 세종은 천민이라도 정치에 도움이 되면 썼고, 낮은 견해라도 쓸모가 있으면 들었다. 세종의 정치적 창조성은 개인의 천재성에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사람의 재능을 잘 활용하는 데 있었다. 세종은 “임금으로서는 포용하는 것으로 아량을 삼는 것이어서, 비록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또한 반드시 들어 보아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맞지 아니하더라도 또한 죄주지 않는 것이 아래의 사정을 얻어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세종은 특정한 문화에 우열을 나누지 않았고, 단지 조선에 실정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한글 창제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국 시대 이래 중국문명의 영향력은 너무 압도적이어서 한국인들은 자기 풍토에 맞는 문명의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했다. 한국 문명의 최고 목적은 중국 문명을 가능한 한 똑같이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농사직설」을 편찬하며 세종이 말한 바처럼, 중국과 한국은 ‘풍토’가 달랐다.(風土不同) 이런 ‘풍토’의 문제는 단지 농법에 그친 것이 아니다. 첫째 말이 다르고, 둘째, 소리가 다르고, 셋째, 산천이 다르고, 넷째, 하늘이 다르고, 다섯째, 수목이 다르고, 다섯째, 관습이 다르고 수많은 것이 달랐다. 이 때문에 새로운 문자, 음악, 회화, 천문학, 의학, 법률 등이 필요했다.
세종대의 정치에서 우리는 정치의 세계에서 거의 발견할 수 없는 ‘행복’을 목격할 수 있다. 물론 세종 시대의 사람이 모두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다. 굶어죽는 사람도 많았고, 옥에 갇혀 원통하게 죽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정치가 모든 인간을 행복하게 해 줄 수는 없지만, 인간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세종은 “나의 생각으로는 무슨 일이든지 전력을 다해 다스린다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을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또한 “천재지변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포와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의 정치는 단순한 정치적 의무를 넘어 인간의 고통에 대한 깊은 연민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것이 베버가 말한 “하늘의 부름에 답하는 정치”(politics as vocation)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세종대의 정치와 사상을 다루고 있다. 세종대의 경이적인 업적을 특히 문명교류와 국가혁신의 관점에서 검토했다. 세종대의 연구에는 세 가지 편향이 존재한다. 첫째, 일국적 관점이다. 한국의 시야에서만 이해하려는 것이다. 둘째, 민족적 관점이다. 과도하게 미화하려는 것이다. 셋째, 문화적 관점이다. 정치보다 문화적 이해에 치우친 것이다. 이에 반해 이 책은 세계사, 비교사, 정치사의 관점을 취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세종대의 업적은 13-14세기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하의 ‘제1차 세계화’(the first globalization)에 의존하고 있다. 몽골제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통일한 결과 유럽과 아랍, 중앙아시아, 중국문명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융합되었다. 13세기 중엽 수많은 고려인이 세계체험을 겪었다. 그 결과 국가혁신의 사상과 운동이 배태되어, 조선건국으로 귀결되었다. 세종은 고려에 유입된 자양분을 소화하여, 전면적이고 종합적인 국가혁신에 착수했다.
한국 역사에서 세종대가 지닌 가장 큰 특징은 한국다운 문명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 한반도의 국가는 중국문명에 압도당해 문명적 자신감을 상실했다. 세종대의 최만리 역시 한글 창제가 중화를 버리고 이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박연은 조선의 향악을 중국의 아악으로서 교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세종은 향악을 “반드시 중국에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중국의 음악인들 어찌 바르게 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중국 음악이론을 집성한 「율려신서(律呂新書)」를 깊이 이해한 뒤의 결론이었다.
세종은 음악뿐 아니라 모든 분야를 원리적으로 이해했다. 이 때문에 맹목적으로 추수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융합할 수 있었다. 고유문명과 세계문명을 융합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것은 한국 역사상 세종대가 처음이었다. 그 결과 국가의 표준이 완성되고, 조선의 전통이 확립되었다. 이것이 한국전통의 오리진이다.
32년간에 걸친 세종의 정치는 하나의 목적, 즉 백성을 하늘이 낳은 사람(天民)으로 섬기고 보살는 것이었다. 세종은 정치의 도리(王道)를 이렇게 말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만 나라가 평안하게 된다. 내가 박덕(薄德)한 사람으로서 외람되이 백성의 임금이 되었으니, 오직 이 백성을 기르고 어루만질 방법만이 마음속에 간절하였다.”(「세종실록」 세종 5년 7월 3일)
세종만의 정치적 특징이 존재한다. 첫째, 철저하게 실용주의의 관점에 서 있다는 것이다. 그의 학문관과 심학적(心學的)인 유교 사이에는 긴장이 존재했다. 조광조는 “도야말로 정치의 출발점”(道乃出治之由)이라고 말했다.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사기」를 읽히고자 하자 윤회는 “경학(經學)이 우선이고, 사학(史學)은 그 다음이 되는 것”이라고 반대했다. 그러자 세종은 학자들이 “말로는 경학을 한다고 하나, 이치를 궁극히 밝히고 마음을 바르게(窮理正心) 한 인사가 있다는 것을 아직 듣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세종실록」 세종 7년 11월 29일) 세종은 산학(算學, 수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토지 측량처럼 수학이 국가의 긴요한 사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둘째, 세종은 듣기와 포용에 뛰어났다. 국정운영에 필요한 것이라면 기존의 틀을 벗어나 과감히 수용했다. 천민이라도 정치에 도움이 되면 썼고, 낮은 견해라도 쓸모가 있으면 들었다. 세종 12년과 15년, 헌릉(獻陵, 태종의 능)의 이장 문제로 세종은 지관(地官) 최양선의 견해를 듣고자 하였다. 그러자 예조좌참판 권도는 국가의 안정은 이런 잡술이 아니라, “육경을 높이시고 백가를 물리쳐서, 마음과 학술을 바르게 하고 간사함과 정대함을 분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 15일) 이에 세종은 “임금으로서는 포용하는 것으로 아량을 삼는 것이어서, 비록 꼴 베는 사람의 말이라도 또한 반드시 들어 보아서 말한 바가 옳으면 채택하여 받아들이고, 비록 맞지 아니하더라도 또한 죄주지 않는 것이 아래의 사정을 얻어 알고 자신의 총명을 넓히게 되는 것이다.”(「세종실록」 세종 15년 7월 27일)라고 말했다.
셋째, 세종은 특정한 문화에 우열을 나누지 않았고, 단지 조선에 실정에 맞는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다. 한글 창제는 대표적 사례이다. 「농사직설」을 편찬하며 세종이 말한 바처럼, 중국과 한국은 ‘풍토’가 달랐다.(風土不同) 조선식 농법이 필요했던 이유는 농법의 기본 텍스트였던 원대의 「농상집요(農桑輯要)」가 중국 황하 이북의 풍토에 적합한 농법이었기 때문이다. 중국 농법의 원리는 채용할 수 있으나, 그 실제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이런 ‘풍토’의 문제는 단지 농법에 그친 것이 아니다. 첫째 말이 다르고, 둘째, 소리가 다르고, 셋째, 산천이 다르고, 넷째, 하늘이 다르고, 다섯째, 수목이 다르고, 다섯째, 관습이 다르고 수많은 것이 달랐다. 이 때문에 새로운 문자, 음악, 회화, 천문학, 의학, 법률 등이 필요했다.
물론 세종 시대에도 굶어 죽고, 옥에 갇혀 원통하게 죽는 백성이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천재지변은 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배포와 조치를 잘하고 못하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 다할 수 있는 것”( 「세종실록」 세종 12년 9월 11일)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고통에 완전히 대처할 수 없지만, 덜 고통스럽고 위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힘의 정치"(power politics)에 대비되는 ‘정치의 힘’(power of politics)이다. 세종의 정치는 베버가 말한 “하늘의 부름에 답하는 정치”(politics as vocation)였다. “자신이 제공하려는 것에 비해 세상이 너무나 어리석고 비열하게 보일지라도 이에 좌절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어떤 상황에 대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할 능력이 있는 사람, 이런 사람만이 정치에 대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직업으로서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