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일본 영화의 대스타 와카오 아야코의 재발견
일본 영화는 1950~1960년대 스튜디오 시스템의 부흥과 함께 전성기를 누렸고, 많은 스타 배우를 배출했다. 와카오 아야코(1933~)는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은 배우 중 한 명이었다. 다이에이(大映) 영화사의 간판스타로 160편의 영화에 출연한 그녀는 특히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과의 작업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독특하고 강렬한 여성의 모습을 표현한 독보적인 배우였다.
2000년대 이후 일본에서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에 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그의 영화 속 대표적 히로인인 와카오 아야코에 대한 관심도 재점화되었다. 일본 각지에서 ‘와카오 아야코 영화제’를 비롯해 그녀의 출연작을 상영하는 다양한 행사가 열리고, 사진집과 출연작 DVD가 새로이 발매되는 등 ‘재발견’ 작업이 최근까지도 꾸준히 이루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2005년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 회고전이 열리면서 와카오 아야코도 함께 조명받기 시작했고, 2013년에는 와카오 아야코가 직접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국의 영화감독들과 대담을 갖기도 했다.
영화사와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여배우를 조명한 ‘본격 배우론’
『여배우 와카오 아야코』(원제: 映画女優 若尾文子)는 이처럼 일본 영화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와카오 아야코를 분석한 책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영화사가이자 평론가인 요모타 이누히코와 페미니즘 및 젠더 이론을 통해 탁월한 영화 비평을 전개해온 사이토 아야코 교수가 각각 1부와 2부를 저술했다. 배우에 관한 전기적, 자전적 서술이나 캐릭터 분석에 국한된 논의가 아니라 감독의 연출과 배우의 연기, 대중문화와 스타 시스템 등의 관점에서 한 명이 배우를 깊이 있게 조명한 본격적인 ‘배우론’이라 할 수 있다.
일본 영화 연구자인 옮긴이는 두 저자가 공히 마스무라 야스조 감독의 영화 속 와카오 아야코의 연기와 캐릭터를 중점적으로 다루면서도 접근 방식과 분석, 논의의 귀결점이 확연히 다르다고 설명한다. 요모타 이누히코가 쓴 ‘1부 욕망과 민주주의’는 일본 영화사라는 큰 줄기에 마스무라의 배우론을 접목한 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의 일본과 동시대 홍콩의 여배우들을 소환해 와카오의 궤적을 추적한다. 일본 영화의 산업적, 비평적 컨텍스트를 전방위적으로 끌어와 와카오의 영화 입문부터 마스무라 감독의 영화철학과 와카오가 표현한 여성의 모습까지를 영화사가의 입장에서 거침없이 서술한다. 특히 그는 스크린 속 와카오가 신화화된 과정을 ‘욕망과 민주주의’라는 논리로 집약한다.
한편 ‘2부 여자는 저항한다’에서 사이토 아야코는 그러한 신화화의 과정에는 남성 감독의 지도에 부응하면서 저항했던 스크린 밖 와카오 아야코의 타협과 투쟁이 개재되어 있음을 규명하고자 한다. 저자는 연구자 이전에 여성이자 관객으로서 자신이 갖게 된 와카오에 대한 모순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것으로 여배우와 텍스트에 대한 중층적인 읽기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페미니즘과 관객 수용이론에 관한 풍부한 레퍼런스를 끌어들여 치밀하게 전개되는 사이토의 논의는 마스무라가 그려낸 여성 표상이 감독의 연출만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배우 와카오 아야코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여배우의 치열한 투쟁이 결부된 ‘우발적’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거듭되는 문제 제기와 텍스트 구석구석을 헤집는 치밀한 분석, 감독과 여배우의 역학 관계를 밝혀내기 위한 수많은 인용 속에서 간혹 혼란을 느낄 수도 있지만, 복잡한 미로처럼 펼쳐지는 논의 속에서 독자들은 지적 스릴과 희열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와카오 아야코 인터뷰와 160편의 필모그래피
이 책은 두 영화학자의 와카오 아야코론에 이어 와카오 아야코와의 인터뷰를 실었다. 당시 60대 후반이었던 와카오와 두 저자가 주고받은 대화 속에서 영화와 배우라는 직업, 함께 작업했던 감독들에 관한 솔직하고 편안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또한 부록으로 영화학자 시무라 미요코가 정리한 와카오 아야코의 출연작 리스트를 실었다. 영화의 기본 내용과 제작사, 개봉 연월일, 각본, 감독, 촬영, 와카오 아야코의 배역 등 160편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를 일목요연하게 소개한 이 목록을 통해 와카오 아야코의 활동 궤적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필름 소실이나 DVD 미발매 등의 이유로 좀처럼 볼 수 없는 작품까지 포함되어 있어 자료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배우의 필모그래피만으로 일본 영화사의 한 정점을 조망하는 특별한 경험을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