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WHO) 헌장 전문에 ‘완전한 신체적, 심리적, 사회적 안녕 상태’로 정의된 건강은 선포된 이후 지금까지 이 지구상에서 한번도 성취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이 모든 영역에서의 완전한 건강이란 아마도 처음부터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북극성 같은 방향표지판이거나, 너무 아름다워 손으로 잡으려는 순간 어느새 저만치 멀어져 있는 무지개 같다고나 할까? 그러므로 건강은 신체적 문제 한 가지에 집중하는 종합병원에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는 더더욱 아닐 것이고, 온 인류가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음에도 무병장수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어보지 못하였다. 불로초를 구하려 동쪽 바다 건너 사신을 보냈던 진시황은 5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흉노를 막으려 백성의 피와 땀으로 만리장성을 쌓았던 진나라는 겨우 15년만에 자기 나라 군인이었던 항우에 의해 패망했던 것처럼 오히려 자원을 한곳에 집중한다면 다른 영역에서의 건강은 더욱 피폐하게 된다.
극빈 국가에서 딱딱한 빵 한 조각과 물 한 모금은 부자 나라에서 맛보기 힘든 기쁨을 잠시나마 줄 수 있다. 그곳 단기 무료의료봉사 캠프 앞에는 멀리서 걸어 온 환자들이 감사한 마음으로 줄을 서나, 우리나라 대학병원의 붐비는 외래 앞에는 조금만 늦어져도 짜증을 내는 환자들이 많다. 그러나 어쩔 수 없다. 우리 백성이 비록 공짜는 아니지만 원가에도 미치지 못하는 보험 수가에 감사할 염치가 없는 게 아니라, 의료가 어느 수준을 넘어서면 조금 더 나은 서비스를 위해 엄청난 대가를 치루고도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는 한계효용체감의 법칙 때문이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고 야금야금 떡을 다 먹었던 호랑이가 결국 오누이의 어머니를 잡아먹은 것처럼, 늘어나는 노인층 인구와 고가의 첨단의료 수요에 대한 행위별 수가의 완전 보장은 우리나라의 보건의료체계를 통째로 잡아먹고 말 것이다.
제한된 의료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하면서도 환자의 만족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답은 주치의 제도 외에는 없다. 그러나 효율성만을 이유로 도입된 제도가 의료비 절감을 위한 통제의 수단으로 전락할까 두려운 의료계가 반대의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주치의라는 말을 꺼내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그렇다고 만성질환관리제와 같은 유사품으로는 주치의의 진면목을 다 보여줄 수 없다. 여러 단체와 연구자들이 제시하고 있는 주치의 제도의 시행 방법을 이 책에서 반복 설명할 생각은 없다. 다만 어쩌다 가정의학과를 찾아왔다가 건강 문제가 해결되고 나를 언제나 주치의로 생각해주시는 환자분들에 대한 보답으로 이야기를 엮어보았다. 좀더 건강하고 나은 세상을 바라는 의사들이 우리나라에 주치의 제도가 없기 때문에 생기는 흔한 문제에 눈을 뜨게 할 목적으로 주치의 결핍증이라는 이름을 짓고 사례를 들었다. 그렇지만 언제나 나의 아내인 가정의학과 전문의 이신휘의 조언, 타과 전문의의 시선으로 글을 검토해 준 손다혜 교수의 남편 순환기내과 하현수 선생님과 육아를 도와주신 어머니들 덕분이 아니었다면 이 책은 재미없는 사례집에 불과할 뻔했다.
이 책을 통해 일단 주치의 결핍증이 보이기 시작하면 주치의 제도의 시행을 더이상 미루는 것은 우리 의사를 주치의라 믿고 따르고 있는 환자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