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대표하는 전방위 사회이론가 니클라스 루만
루만은 사회적인 것을 모두 포괄하는 일반 체계이론을 펼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정치, 경제, 사랑, 종교, 교육, 법, 학문, 위험, 생태, 도덕, 윤리 등 사회의 주요 영역을 탐구했다. 루만은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한 뒤 뤼네부르크에서 행정 직원으로, 첼레에서 법률 사무직으로, 니더작센주 문화교육부에서 고등 사무관으로 재직했다. 퇴근 후에는 철학, 문학, 사회학, 문화인류학 등의 학문을 파고들었다. 1960년 루만은 하버드 대학교로 연구 휴가를 떠나 탤컷 파슨스와 깊이 교류한 뒤 본격적으로 사회학이론에 몰두하여 저작과 논문을 발표한다. 1968년 루만은 빌레펠트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로 임명되는데, 이는 독일어권 최초의 사회학 교수 자리였다. 당시 대학에 제출한 연구 계획이 바로 “대상: 사회이론, 기간: 30년, 비용: 없음”이다. 1993년 정년 퇴임 때까지 루만은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에 매진했다.
사회를 파악하는 유일하고 효과적인 시도, 체계이론
“체계이론은 더 이상 사회를 단순하게 자본주의의 관점에서 보는 대신 누군가에게 위해인 것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생생한 위험으로 간주되는 사실을 고려하면서 사회를 파악할 수 있는, 현재로서 유일하고 효과적인 시도입니다.”(152쪽)
《아르키메데스와 우리》 초판이 출간된 1987년은 사회학계에서 사회학 및 사회학이론의 위기가 거론되던 때였다. 세계와 사회는 날로 복잡해지고 설명하기 어려워지는데, 사회학 안팎의 이론적 자원을 통일적으로 구축하는 이론이 부재하다는 진단이 제기되었다. 이 시기 루만은 체계이론을 제시하여 고전적인 주체-객체 개념을 깨트렸다. 사회가 더 이상 계급이나 재산으로 나뉜 개인들의 집단이 아니라고 본 것이다. 대신 루만은 커뮤니케이션 개념으로 체계와 환경을 파악한다. 그에 따르면 사회는 경제, 정치, 법, 예술과 같은 사회 체계의 커뮤니케이션 유형으로 구성된다. 그는 체계와 인간이 대립한다고 보지 않았다. 루만에게 커뮤니케이션에 기반을 둔 체계이론은 사회를 분석하기 위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그의 이론은 사회적인 것의 단면이 아니라 전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보편적이다. 루만은 거대한 구조들의 자기적응 능력을 믿었다.
루만과 사회학에 다가서는 실험적인 진입로
“대담은 매번 새롭고 우연한 질문을 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답변 역시 참된 지식을 전수하거나 보장하는 대신, 이미 주어진 형식을 새로운 형식이 될 수 있도록 자극하는 ‘조형적인 질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비대칭성이 대칭성으로 전도되고, 전도된 대칭성은 다시 새로운 형식이 되어 비대칭화되는 자기지시적인 순환 관계에 놓인다.”(287쪽)
니클라스 루만은 ‘이념 요새’라고 불리는 인물이다. 사회학이론에서 난공불락의 요새를 쌓은 사회학자라는 뜻을 담은 별명이다. 가 구축한 이론은 마치 거대하고 견고한 성채와 같다. 방대한 저술 자료와 더불어 이론의 추상성과 복잡성 그리고 난해함은 독자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그러나 이 대담집은 루만과 그의 이론에 다가서는 수월한 진입로가 되어준다. 질문과 답변으로 이루어진 대담에서는 독자에 대한 저자의 우월성이 전복될 수 있다. 글로 설계된 문장에서는 찾기 어려운 우발적인 말들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나타나며, 이는 생기를 유발하는 동시에 암시를 자라게 한다. 독자는 루만의 이론서를 곧장 읽는 대신, 대담 진행자와 루만의 상호 작용을 관찰하며 오히려 저작의 핵심으로 직진할 수 있다. 대담집이 루만과 사회학으로 다가서는 “실험적인 진입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생산성의 비결은 메모 카드
장인이나 선지자가 아닌 관찰자의 자세로
《아르키메데스와 우리》에는 니클라스 루만의 작업 방식도 숨김없이 드러난다. 루만은 이론의 깊이와 넓이뿐 아니라 방대한 저술 작업을 가능하게 한 생산성에 관해서도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다. 그는 이 생산성의 비결로 ‘메모 상자’를 꼽는다. 루만은 아이디어를 적을 수 있는 메모지를 언제나 소지했으며, 평생 9만 장이 넘는 메모 카드를 기록하고 보관했다. 루만은 1950년대 초부터 메모 상자로 작업을 했고, 번호를 매겨 메모끼리 연결하는 독창적인 참조 방식을 만들었다. 그는 종종 책을 쓸 때보다 메모 상자 작업에 훨씬 많은 시간과 공을 들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담 진행자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답하는 루만의 어조는 건조하고 추상적으로 느껴지지만, 그렇기에 더욱 선명하고 명료하다. 학자로서 학문을 대하는 철저함과 성실성이 곳곳에 드러나기도 한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사회를 이론화하는 학파의 장인이나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저는 […] 기껏해야 어떻게 변화가 지속되는지 관찰하고 이론에서 부족한 부분을 찾는 사람일 뿐입니다.”(145쪽) 독자는 이처럼 변화를 관찰하고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루만의 시선과 사상을 거듭하여 관찰하면서 읽고 생각하며 비판할 수 있다. 이 대담집을 읽으며 독자는 관찰자를 관찰하는 풍부한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시리즈 소개
반향(反響)
오고 가는 말, 퍼져가는 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