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상의식촬요(農桑衣食撮要)」는 농업과 양잠이 곧 만백성 의식(衣食)의 근원이라는 요지를 담은 농서로서, 1314년[延祐 元年]에 원대 노명선(魯明善)이 월령형식으로 편집하여 근세의 여명기에 나타난 재배작물의 실태와 농민의 일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본 역주서의 저본은 왕위후[王毓瑚] 교주(校註)의 「농상의식촬요(農桑衣食撮要)」(중국농업출판사, 1962)이며, 중국에서조차 아직 본서의 번역서가 출간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출판의 의의가 있다.
저자 노명선의 행적은 「원사(元史)」에 열전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의 막료인 장률(張㮚)의 서문에 의하면, 노명선은 위구르인으로 이름은 철주(鐵柱)이고 명선(明善)은 그의 자라고 한다.
자서 속에 나타난 저자의 저술 동기는 한 마디로 농민에게 의식(衣食)의 근본인 농상(農桑)을 익히게 하는 것으로, 이러한 생각은 부를 창출하고 풍족한 식용의 길을 찾아 위로는 부모를 섬기고 아래로는 자식을 양육할 바탕을 마련할 수 있고, 의식이 족해지면 예의로써 교화할 수 있으며, 그렇게 되면 국가와 천하는 오랫동안 안정되고 평화가 유지될 수 있음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장률이 서문에서 지적한 것처럼 평소에 일용의 근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어린이와 노인일지라도 한번 보면 바로 알 수 있도록 책을 구성하여 백성의 근본을 굳건하게 하고자 했다. 더구나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에 따라 농업에 종사하고, 본서를 널리 다른 지역에까지 보급할 것을 바랐던 것을 보면 저자의 농민 의식(衣食)에 대한 관심과 관리(官吏)로서의 책임의식을 느낄 수 있다.
본서의 구성은 상하 2권으로 편성되어 있으며, 상권은 정월에서 6월까지이고, 하권은 7월에서 12월로 되어 있다. 각 권은 월별로 농사일을 다양하게 편성하고 있는데, 상권의 경우 3월(전체 농사일의 18.4%), 2월(14.5%), 정월(12%), 6월(10.1%)의 순으로 농사일이 집중되어 있고, 하권은 12월(7.2%), 9월(6.3%), 8월(과 10월: 5.8%)의 순으로 농사일이 배열되어 있는데, 재배와 작업의 가짓수만으로 헤아리면 전반기(1-6월)의 양이 68.6%로서 후반기의 31.4%보다 2배 이상 많다. 봄, 여름에는 각종 곡물, 과수 및 야채 파종과 김매기, 치즈나 버터와 초(醋) 등의 가공식품의 제조와 누에치기에 주목했고, 가을과 겨울에는 수확과 저장, 보수(補修)와 나무 베기, 야채절임 등의 작업이 많았다. 특히 12월과 1월에는 납육(臘肉), 기름 제조, 수리와 정비작업 등이 집중되어 있다.
본서의 저술시기가 원대였던 것은 주목할 만한 특징 중 하나이다. 송원대는 시대구분상으로도 당송의 변혁기를 거쳐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며, 이러한 현상은 농서 상에도 반영된다. 우선 일상을 제시한 월령형식도 차이를 보인다. 기존의 「예기 ㆍ 월령」, 한 대(漢代)의 「사민월령」, 당대(唐代)의 「사시찬요」와는 달리 본서는 자영농민의 민생에 필요한 생산 활동을 총결한 가이드북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저자 노명선이 서북지역 출신으로 본서를 집필하면서 자연스레 한족 노농(老農)들의 생산경험과 서북 소수민족의 생산경험을 총결했을 것이며, 그렇게 정립된 농업기술과 생산방식이 재차 외부로 전파되는 데 가교 역할을 했던 것이다.
필자는 본서를 역주(譯註)하면서 「농상의식촬요」를 가운데 두고 이전 단계 농서와의 수용과 변화를 살피고, 이를 통해 원대 농촌과 농민 그리고 농업의 일상을 들여다보고자 하였으며, 나아가 송원시대에 정착된 이들 기술이 외부로 어떻게 전파되고 수용되었는지를 조선의 농서와의 비교를 통해 살폈다. 따라서 본 역주서는 중국 고중세의 농업이 근세를 거치면서 어떤 모습으로 변했으며, 인접한 조선의 농업에는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필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농상의식촬요」를 연구하면서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점은 바로 판본(板本)의 문제와 그 판본을 수집하고 정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경주한 왕위후[王毓瑚]의 업적이다. 「농상의식촬요」의 판본과 관련된 문제는 본 역주서에 실린 왕위후의 서언[引言]에 잘 담겨있다. 왕위후는 본서를 정리하면서 명나라 때 판각한 ‘농상촬요본(農桑撮要本)’을 가장 중심으로 삼았는데, 그 이유는 명대 각본의 내용이 비교적 완전하고 착오가 적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왕위후는 그의 서문에서 “본서의 교정 작업은 진실로 원서의 면모가 보존되어 여러분들이 참고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하여 복원된 원서의 보존을 염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