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생의 단면을 환하게 뒤집는
매일의 사랑과 명랑
당신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
어떤 동물, 어떤 식물,
바다, 바위, 조약돌, 모래알,
천공, 구름, 노을, 바람……
당신은 그들을, 혹은 그 속에서
살기를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 삶을 발견할 것입니다
뛰어드세요!
- 「에세이의 탄생」 부분
“마음 가는 대로 시작되는 곳에서 시작하고 그치고 싶은 데서 그쳐도 그만”(「에세이의 탄생」)이라는 구절을 반영하듯 부를 나누지 않은 채 흐르는 시편들 사이로 “-ㄹ까” 혹은 “(-겠)지” 등의 종결 어미가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시 속에서 그러한 화자의 물음이나 추측은 대개 사실의 확인이나 응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존재의 근원을 헤집어놓는 아픔이기도(“엄마는 왜 나를 버렸을까/그것은 일생을 지배하던/내 궁금증이었습니다”-「월광」), 약한 존재를 향한 측은지심이기도(“얼마나 기다렸을까/나보다 먼저 다녀간 고양이”-「밤의 발자국」), 지난 시간에 맺힌 그리움이기도(“어디로 갔을까/해당화꽃 떠다니던/그 봄날의 바다”-「방파제에서」) 하지만 종내에는 이기(利己)를 버린, “한 모금도 꿈 없는/시/하하, 무념무상!”에 가닿는다(「꿈」). 스스로 “나도 모르는 사람 같”(「나도 모르는 사람」)아진다.
황인숙의 시에서 이처럼 세상을 비껴난 나(화자)의 무지(無知)는 무기력한 비탄에 빠질 때가 없는데,
누군 죽어 지내는 맛도 있다지만
나는 그런 맛 몰라
무식한 건 무서운 거야
벽을 문처럼
까부수고 나가는 거야
난 그렇게
이겨왔다우
- 「장터의 사랑」 부분
오히려 내면에서 솟구친 “무서운” 힘이 바깥세상으로, 소음과 움직임이 득시글한 “장터”로 나를 이끈다. 그리하여 낮아지고 낮아져 소리조차 내지 않는 것들의 목격자가 되며, 가냘픈 “소리”와 도심을 울리는 “음악” 사이의 드넓은 간극 한가운데 걸음을 멈춘 사람이 된다. 그때의 슬픔은 무지가 아닌 “나는 모차르트를 잘 모르지만/그래도 이 음악이 모차르트라는 걸 안다”-(「대로의 모차르트」)는 분명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동시에 이러한 식자(識者)로서의 앎은 어둡고 외딴 곳을 디디며 “소리 없이”, 음악이 아닌 것으로 존재하는 작은 생명(이를테면 “비둘기”)의 존엄을 역으로 더욱 크게 일깨우는 구실을 한다. 화자는 숱한 물음과 추측 끝에 나를 잃고, 나를 모르게 되고, 기어이 나 아닌 것들에게 안을 내주고 만다(“나도 아이를 낳았으면/너만큼이나 대책 없는 어미였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너나 나나”-「겨울 이야기」, “그 밤에 당신이 너무 배가 고팠으면/나는 어쩌면 좋은가” “낮고 외롭고 쓸쓸한/당신, 우리”-「동자동, 2020 겨울」, “종일 올 건가, 비?/그래, 그런 마음도 있지/쏟아져라, 쏟아져!”-「오늘도 비」).
세계의 수면 위로 힘껏 내던지는 시니피앙
수수께끼로 주고받는 내일의 삶
아이의 호기심과 어른의 피로가 얼크러진 황인숙의 시 세계는 삶이 던진 패러독스의 난장(亂場)이다. “아직 오지 않은 고양이 생각을 하면서 고양이 밥을 꾸려 담”(「동자동, 2020 겨울」)고, 주린 비둘기에게 “내가 건네는 한두 줌 낟알”(「어떻게 사는지 모른다」)의 무게를 실감하는 사이 나는 서민이었다가 이주 노동자였다가, 고양이였다가, 비둘기가 된다. 고단한 몸을 이끌고 “비틀걸음 옮기며” “비몽사몽 스치며”(뒤표지 글) 걸음을 떼는 황인숙의 세계에서는 어두운 밤조차 신체를 얻고 펑펑 쏟아지는 눈 속에 푹푹 빠진다(“밤이 푹푹 빠지는/눈이 펑펑 쏟아지겠지”-「발이 푹푹 빠지는 밤」). 끝없이 죽음 너머의 안부를 묻지만 생의 울타리를 넘는 법은 없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고종석의 말처럼 “시니피앙들을 세계의 수면 위로 힘껏 내던지는 물수제비뜨기의 달인”으로서, 시인이 풀어놓은 시어들은 시종일관 재재거리며 싱그럽게 빛난다. 감각으로 빚어진 선천적 자질이라고밖에 부를 길 없는 매일의 명랑이 슬쩍 들춘 자리엔 즐거운 “수수께끼”가 여지없이 숨어 있으며 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는 동안 내일이 온다(「수수께끼」). “울어도 삶은 이어질” 것이므로(「누수 타임」), 죽음보다 삶의 슬픔을 나누는 것이 최선이라는 믿음이 거기에 있다.
무아지경으로 흐르는
자타불이의 세계
해는 새의 눈
모든 새의 눈
밤에는
부엉이 눈에
들어가 있지
-「새의 눈」 전문
황인숙의 시에서는 이렇듯 물음이나 추측이, 저간의 사정을 궁금해하는 동안 돌돌 뭉친 걱정과 헤아림이, 시간의 일부를 차지하고 끝내 ‘나의 삶’이 되어버리는 과정이 고스란하다. 대상을 억지로 주무르고자 하는 집착과 욕망이 없다. 시공간을 비트는 인위적인 재구성이나 드라마틱한 의미 부여 또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그저 있었다가 사라진 존재와 사라짐 후에 도착한 마음이 시인의 입을 통과할 뿐이다. 우리는 마을이 흘러가는 소리를 엿듣고 백지에 안착한 몇 자의 외침을 본다. 모양을 숨긴 채 밤에 사는 사람과 생물 들을 목격하며 그들과 혼연이 된 시를 읽는다. ‘너’와 ‘나’의 구분이 무화된 지점에서 싹트는 숭고한 사랑. 그것은 종류를 막론한 신앙의 근본 교리와 정서에 가깝다. 사랑의 형체로 사랑의 빛깔을 띠고 이곳에서 저곳으로, 무아지경으로 흐르는 자타불이(自他不二)의 세계. 황인숙의 시는 이를 환하게 열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