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대서사시를 건네는 건 독자에 대한 무한한 신뢰다.” - 오세란 문학평론가
인류의 기원을 밝히는 대서사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대장장이 왕 1: 젤레즈니 여왕 데네브가 한 곳에서 새로운 별이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태초에 신이 있었다
신은 대장장이 왕에게 창조의 능력과 함께 단 하나의 금기를 내린다
인간만은 창조하지 말 것!
‘대장장이’는 고대 농경 사회에서 농기구를 제작하거나 전쟁에서 사용할 무기를 제조하는 뛰어난 능력을 가진 기술자이자 장인이었다. 대장장이의 능력은 종종 신에게 위임받았다고 여겨졌기에 여러 나라의 신화에 대장장이와 신의 밀접한 관계가 나타난다.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가진 이런 상징과 은유는 작품 전체를 관통하며 주제와 서사를 이끈다.
『대장장이 왕 1』 작품 속에서 신은 최초의 대장장이를 만나 그를 자기의 대리인으로 삼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을 대장장이 신이라 부르고, 대장장이 왕은 신의 권능을 받아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만들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 낸다. 이때 신은 대장장이 왕에게 창조의 능력과 함께 단 하나의 금기를 내린다. ‘인간만은 창조하지 말 것!’ 에퍼(전쟁고아라는 의미)였으나 대장장이 사제들로부터 선택받고, 본인 또한 왕이 되는 운명을 선택함으로써 서른두 번째 새 대장장이 왕으로 성장하게 되는 인물 에이어리도 이 금기를 지키는 것에 있어 예외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대장장이 왕 의식을 치를 때 만들어 낸 무언가의 형태는 결코 예사롭지 않은데…
”당신의 새 이름은 에이어리입니다. 서른두 번째 왕이시여.”
다시 찾아 온 정통 판타지
『대장장이 왕 1』을 읽는 순간, 독자는 이 작품이 얼마나 큰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독자에게 익숙한 시공간을 작품 속 판타지 공간으로 삼지 않고,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아닌 신화적 공간을 화폭으로 삼은 선이 굵고 큰 판타지 작품이다.
1권은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관의 초입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거대한 제국을 꿈꾸는 한 나라와 주변의 작은 나라들, 마법사 나라의 왕 라토와 그의 쌍둥이 동생 아리셀리스의 예언으로 묶인 운명, 몰락한 숲의 나라 스타인의 왕 무스텔라와 그의 아들 레푸스, 대장장이 신을 섬기는 일곱 사제들, 괴물을 연구하는 스타인 출신의 박식한 박물학자 플리니, 젤레즈니 나라의 여왕 데네브 등 앞으로의 활약이 기대되는 인물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앞으로 펼쳐 나갈 이야기의 토대를 촘촘히 쌓는다. 카니세리움 같은 새로운 창조물을 통해서는 다양한 영물과 괴물의 등장에 대한 독자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고, 주인공 에이어리가 대장장이 왕 의식을 치르며 “당신의 새 이름은 에이어리입니다. 서른두 번째 왕이시여.”라고 새 이름을 부여받는 장면에서는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한껏 연출한다. 현재 우리가 사는 공간을 활용한 어반 판타지(Urban Fantasy)와는 확연히 다른 정통 판타지만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의식을 치른 후 대장장이 신전에서 무기를 다루는 가르젠, 이전 대장장이 왕이었던 오카브의 지도를 받으며 지내던 에이어리는, 청년이 되던 해 그의 경쟁자였다가 단짝이자 호위 무사가 된 데스커드와 함께 대장장이들이 모여 살던 마을을 떠나 제국을 향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는다. 앞으로 인물들은 어떻게 헤쳐 모일지, 작품 속 각 나라의 지도는 어떤 국경선이 그려질지 추리하고 상상해 보는 재미가 2권을 기다리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 않을까.
신화, 전설, 설화 등 모든 스토리의 원형原型이 녹아 있는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관을 엿보는 새롭고 강렬한 쾌감
『대장장이 왕 1』은 최근 판타지와 차별되는 정통적이고 클래식한 하이 판타지이다. 쉽게 가늠되지 않는 시대적 공간적 배경, 어마어마한 등장인물의 수, 낯선 네이밍(인명, 지명, 나라명 등)까지 독자가 이야기에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요소가 다분하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이토록 흥미진진한 것은, 작가가 만들어 낸 세계관을 엿보는 것만으로도 한 사람의 독자로서 즐겁기 때문이다.
세계관은 문자 그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란 뜻의 철학 용어다. 각종 종교의 세계관을 비롯해 관념론과 실재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 창조론과 진화론, 발전론과 순환론 등 세계를 보는 관점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허교범 작가는 서사에 작가가 세계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놓았다. 게다가 이 세계관은 작가의 상상만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공유해 온 신화, 전설, 설화 등 모든 스토리의 원형(原型)들이 그 안에 녹아 있다. 그렇기에 낯선 듯 익숙하고, 상상을 초월하면서도 현실인 듯 착각하게 한다.
이렇듯 독자는 현실 세계와 가장 거리가 먼 대척점에 위치한 문학 장르인 판타지에서 가장 날 것의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현실의 정치, 현실의 민주적 담론, 현실의 인간 본성까지. 우리는 이 비현실적인 이야기 속에서 가장 친숙한 현실 그리고 현실의 나를 마주하게 되고, 이 아이러니가 새롭고 강렬한 쾌감을 준다.
좋은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우리가 느끼는 것 중 하나로, 내가 다른 사람의 관점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내가 나를 벗어났다는 느낌을 들 수 있다. 『대장장이 왕 1』 또한 그렇다. 작가가 정성껏 빚은 세계관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내가 나를 벗어났다는 기분을 느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