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바구니 담기 close

장바구니에 상품을 담았습니다.

이우성 저작집 세트

이우성 저작집 세트

  • 이우성
  • |
  • 창비
  • |
  • 2010-01-11 출간
  • |
  • 준비중
  • |
  • ISBN 9788936479763
판매가

230,000원

즉시할인가

207,000

배송비

무료배송

(제주/도서산간 배송 추가비용:3,000원)

수량
+ -
총주문금액
207,000

이 상품은 품절된 상품입니다

※ 스프링제본 상품은 반품/교환/환불이 불가능하므로 신중하게 선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출판사서평




전통과 현대, 문사철(文史哲)을 통섭한 한국학의 거목 이우성!

이우성(李佑成) 선생은 1925년 생으로 성균관대 교수 및 대동문화연구원장, 연세대 석좌교수,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퇴계학연구원장 등으로 활동하는 한국학의 대표적인 원로학자이다. 이우성 선생의 자(字)는 사길(士吉), 호는 길보(吉甫), 서벽외사(栖碧外史)가 있는데 후자를 줄여 벽사(碧史)로 널리 통용된다. 그는 정년퇴임 후 현재 80대 중반의 나이에도 실시학사(實是學舍)에서 젊은 제자들에게 강학을 하며 한시도 공부의 끈을 놓지 않고 있으며, 그 결과 그의 지도가 아니면 나올 수 없는 많은 역주서(譯註書)들이 출간되었다. 이번에 출간되는 이우성 저작집은 제자들이 수년전부터 발간을 추진하여 1년여의 편집작업 끝에 완성한 것으로, 그간 산발적으로 간행되었던 그의 저서를 한 질의 저작집으로 묶은 것이다. 송재소 임형택 김시업 등 그 자체로 한국의 한문학을 대표하는 학자들이 후학으로서 간행위원진에 참여했으며, 벽사의 수많은 젊은 제자들이 편집작업에 합류했다.

벽사 이우성은 전통적인 한학 교육을 바탕으로 진보적 신학문을 적극 섭취하여 주체적인 한국학 연구의 신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그는 6세부터 성장기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인 한문을 수학했고, 20세 무렵부터는 신학문을 공부하면서 광범위한 서양지식을 독학으로 답파(踏破)했다. 그의 학문활동은 역사적 실천과 밀접하게 연관되었는데, 1960년대 학원민주화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동아대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으며, 1980년대에는 군부독재에 저항하다가 구속수감되고 성균관대 교수직을 4년간 박탈당했다. 그는 지와 행이 일치하는 전통적 의미의 참 선비이자 오늘날 말하는 실천적 지식인이라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분절화된 근대적 지식의 경계를 넘나드는 자유로운 소통의 글쓰기

이른바 문사철(文史哲)이 극도로 세분화된 이 시대에 벽사 이우성은 드물게도 이 세가지를 겸비한 학자이다. 한국한문학회, 역사학회, 한국실학학회 등의 회장을 역임한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남들이 지니지 못한 폭넓은 시야를 가지고 한국학 전체를 통섭(統攝)하는 학문적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저작집이 포괄하는 주제들을 보면 저자가 얼마나 폭넓은 지식을 섭렵했으며 다양한 형식으로 학문활동을 해왔는지 알 수 있다. 특히 근대의 분절화된 지식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소통을 추구하는 점과 고금을 가로지르는 글쓰기 방식은 우리의 눈길을 끈다. 또한 벽사 이우성이라는 하나의 주체가 글쓰기를 통해 자기를 실현한 저작들에는 근대적 방식과 전통적 방식이 공존하는 독특한 형태를 엿볼 수 있다. 이를테면 『벽사관문존』은 순한문으로 서술된 저작으로 저자 자신의 창작의 출발점이자 종점인데, 기실 이 저작은 근대적 내용을 담고 있다. 이처럼 그의 진수와 본령은 전통에서 연원하지만 근대적 글쓰기를 통해서 실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벽사의 학문세계는 문사철(文史哲)을 모두 포괄하지만, 그 중심을 꼽으라면 역사학을 들 수 있다. 특히 이번 저작집에서 『한국의 역사상』과 『한국중세사회연구』가 말해주는 바가 그것이다. 또한 『한국고전의 발견』에서는 그의 역사적 학문세계의 폭과 깊이를 가늠할 수 있고, 『신라사산비명 교역』에서는 실증적인 학문태도를 실감할 수 있다. 흔히 ‘이우성 사학’은 내재적 발전을 중시하는 민족사관으로 일컬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나’와 역사의 주체를 일치시키려는 확고한 자아의 각성에서 시작된 실천적 고뇌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한국학술사의 한 시대를 획(劃)하는 기념비적 성과물

이우성 저작집은 한 개인의 흩어진 저작을 한곳에 모아둔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 분화된 학문간의 통합, 전통과 현대의 소통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한국학술사에 한 획을 긋는 기념비적 성과물이다. 편집에도 공을 많이 들였는데, 특히 우리 역사와 옛 문헌에 익숙지 않은 세대와 관련 분야 전공자가 아닌 지식인도 접근이 용이하게끔 정성껏 손질했다. 한자를 괄호 안에 넣고, 한문원전 인용부문을 번역해 싣는 등, 다음 세대들이 지적 호기심을 느낄 수 있게 원로학자가 최대한 노력했다.
이렇게 편집·출간된 벽사 이우성의 글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깊이를 그대로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문학 관련 글에서는 문장 하나가 지닌 문학적ㆍ문화적 함의를 생생하게 음미할 수 있고,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과거라는 거울과 맞대면시키는 역사 관련 글에서는 현재의 이정표이자 나침반을 발견할 수 있다. 나아가 민족고전의 가치발견과 재해석, 한 인간의 존재양상과 고뇌 그리고 그 의미를 해석한 글에서는 깊은 철학적 울림을 느낄 수 있다.

제1권 한국의 역사상 - 이우성 史論集 (1982) 부제에 밝힌 대로 사론적 성격의 저서로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주제를 폭넓게 다루었다. 우리나라의 역사상(像)을 그려내는 것이 이 책의 의도인데 실학론에 비중을 두었다.

제2권 한국중세사회연구 (1991) 1960년대에 발표한 역사학 논문을 수록한 것으로, 저자의 주전공인 고려사 연구가 중심을 이룬다. 사회의 기초로서 토지소유 관계 및 사회계층의 동향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보고에,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한 역사적 시각의 분석이 또한 돋보인다.

제3권 한국고전의 발견 (1995) 우리 민족의 고전적(古典籍)에 대한 해제적인 성격의 글 모음으로, 이규보(李奎報)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김창숙(金昌淑)의 『심산유고(心山遺稿)』에 이르기까지 주요 문헌이 망라되어 있다. 각 문헌에 담긴 내용을 파악하여 가치를 규명하고 그것이 어떤 역사적 의의를 지녔는가를 밝힌다.

제4권 실시학사산고 (1995) "실시학사"는 저자의 정년퇴임 후 "제2의 삶의 터전"이며, "여러 종류의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라는 의미에서 "산고"라고 표제한 것이다. 『한국의 역사상』『한국중세사회연구』 간행 이후 발표한 논문 형식의 글과 함께 서문·비문(碑文)·잡문 등 산문 작품을 아울러 수록했다.

제5권 벽사관문존(上) ― 詩 (2005) 한문학 형식의 글 중에서 시작품을 수록한 것이다. 소년기로부터 만경의 최근작까지를 창작의 경위에 따라 편성했다.

제6권 벽사관문존(下) ― 散文 (2005) 산문집은 문체별로 편차(編次)하여, 서간·논설·서발(序跋) 등으로 엮어져 있다. 외형상으로는 전통적인 문집의 체제와 달라 보이지 않으나 그 내용은 크게 다르다. 초기의 것은 참신하고 독견(獨見)이 번득이며, 후기의 것은 학술 논고로 우리나라 학술사의 요체를 짚는 내용이다.

제7권 신라사산비명 校譯 (1995) 최치원의 사산비명의 원문을 교감하고 이에 대한 제가의 주석들을 검토, 산정(刪整)하고 신주(新註)를 가한 다음, 우리말 번역문을 붙였다. 사산비명은 불가(佛家)의 문자에 그치지 않고 민족문화의 귀중한 보전이면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것이다. 이에 대해 정치한 고증학적 작업을 거쳐 현대인이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제8권 고양만록 ― 한국학의 저변 (2005) 논문과 설림(說林), 그리고 책에 대해 붙인 해제·서문·간행사 및 치사(致辭) 등으로 엮어져서 『실시학사산고』와 유사한 성격이다. 저자가 경기도 고양으로 이주(移住)를 한 까닭에 "고양만록"이라고 표제하였다. 오로지 책과 학문의 사이에 침잠하는 생활의 반영인데, 한국학의 이해에 기반이 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저작집은 이우성 선생님 개인적으로는 일생의 업적을 정리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후학들에게는 앞으로 공부하는 데에 더없이 좋은 나침반이 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저작집은 한국학술사의 한 시대를 획(劃)하는 기념비적인 성과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 송재소 "간행사" 중에서

『이우성 저작집』은 한 근대주체의 자아실현의 글쓰기 결과물로서 한국 근대의 가장 격조 높고 독창적인 증언으로 손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 박고통금(博古通今)의 내용과 형식은 계왕계래(繼往啓來)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임형택 "후기" 중에서

문ㆍ사ㆍ철을 겸비한 실천적 지식인
이이화 (한국사학자)

이우성, 그를 보면 언제나 깔끔하다는 인상을 받는다. 술자리에서도 술을 석 잔쯤만 마셔 불급란(不及亂)을 지키며 말도 적당한 정도에서 절제한다. 논문을 써도 짤막하면서도 정수를 찌르고 의례의 인사말을 할 때에도 핵심만을 말한다. 부정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가까이 가지도 않는다. 이를 두고 누가 ‘차돌멩이 같은 선비’라고 표현하였다. 그는 학문에서는 진보적 탐구를 거듭하였으나 생활에서는 엄숙주의 또는 근엄주의의 분위기를 풍긴다.
그는 가학(家學)을 충실히 계승한 모범이 되었다. 그의 가학은 실학을 선양하고 우리 역사를 발굴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졌다. 다시 말해 성리학적 분위기에 침체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전통교육을 받았고 청년시절에 고전의 소양을 길러 이미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그가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에 고난의 역정을 걸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비교적 순탄한 편이었다. 다만 현실의 벽에 부딪혀 비판정신이 고양되어 때로 압제를 받았을 뿐이다.
그가 학문의 길에 들어선 뒤에는 대체로 경향을 달리하는 두 쪽 인사들과 교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선 그는 강진철 같은 사회경제사학자들과 만났다. 그는 청년의 나이에 유물변증법 이론과 토지의 사적소유론에 관심을 기울이고 사회경제사학에 심취하였다. 또 다른 한편 김창숙, 조윤제 같은 우파적 민족주의자들과 인연을 맺으며 선후배로 대화를 나누었다. 이 두가지 다른 경향의 접촉은 그로 하여금 관심의 대상과 폭을 넓히게 하였다.

일본 학자들의 기존 견해 뒤집어

그는 중세사(고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물로 그는 신라 때부터 토지의 사적 소유가 있었다는 실증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일본 학자들이 중국과 일본에는 사적 소유가 중세 이전에 있었으나 조선에는 있지 않았다고 보았는데 그 관점을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부곡(部曲)을 천민제도라고 보았던 국내외 학자들의 견해를 부정하고 부곡의 주민이 일반 군현의 양민과 신분이 다를 바 없다고 밝혔다. 그는 발해를 민족사 안으로 끌어들였다. 곧 신라와 발해는 한 민족으로 남북국시대를 전개했다는 논리이다. 이는 분단을 경험하고 있는 현실에서 통일을 추구하는 사관의 발로였다.
그는 또 실학연구에 몰두하였다. 실학파를 그 지향에 따라 계파를 분류하고 그들이 추구한 개혁사상을 규명하여 내재적 발전론이라 규정하였다. 실학파를 우파와 좌파로 분류하고 경세치용파와 이용후생파의 특징을 논파하였다. 필자도 이 이론에 따라 실학을 이해하고 공부하고 있다. 그래서 근대로의 지향을 실학의 시기로 잡아 자본주의 맹아론을 도입하였다. 그의 연구실 이름을 실사구시에서 따와 ‘실시학사(實是學舍)’라고 이름하였다.
이와 함께 문헌자료발굴에도 일정하게 공헌하였고 한문학 연구에도 업적을 쌓았다. 아무튼 고려사와 실학사를 통해 ‘민중이 역사의 주체’임을 밝히는 작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는 민중을 들먹이면서 생활은 민중과 밀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해요”라고 말했다. 자기반성의 한 표현일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한반도의 특수성을 인정하고 민족주의를 추구하였다. 사회경제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의 접목과 조화라고 할까?

사회경제사학과 민족주의사학의 접목

이런 학풍은 김용섭, 성대경, 강만길, 정창렬, 김태영 등으로 연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문학 내지 문학사 쪽에 송재소, 임형택, 김시업 등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다. 오늘날은 도제(徒弟)를 배격한다. 그만큼 학문의 경향이 다양해지고 자기의 주견이 존중되는 시대이다. 이른바 ‘벽사학파’를 거론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그에게 배우고 그의 이론을 따르는 학자들은 이 땅에서 ‘진보’를 표방하고 민족민주의 가치를 추구한다. 따라서 그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어용단체는 거들떠보지 않으면서 창작과비평, 그리고 한국역사연구회나 역사문제연구소 같은 곳의 관련 인사와는 즐겁게 어울린다.
그는 성균관대에 한번 몸을 담은 뒤에 여기를 떠나지 않았다. 그런데 신군부가 테러를 자행하자 그는 주동자가 되어 강만길, 정창렬 등과 함께 이를 항의하는 교수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 사건으로 해서 그는 문초를 받고 학교에서 쫓겨났다. 여기에 참여한 교수는 361명이었다. 물론 그 뒤에 복직되었으나, 국가폭력에 맞선 한 지성인으로 시대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는 1986년 심산상을 제정하였다. 민족독립운동가로 성균관대를 설립하고 반독재항쟁에 나선 심산 김창숙의 정신을 받들려는 취지였다. 그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고 수상 대상자를 물색하였다. 그런데 그 수상 대상자의 자격에 여느 경우에서는 볼 수 없는 항목이 있었으니 민주운동에 기여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규정이 들어갔다. 쉽게 말해 “감옥생활을 몇번씩 해본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규정에 걸맞게 첫 수상자는 언론운동을 벌인 송건호였다. 오늘날도 이런 기준은 변하지 않았고 성대경 등 심사위원들도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적어도 1990년대 이전에 이런 상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바로 그의 학문관, 현실관을 단적으로 반영한 하나의 보기일 것이다.
그는 한문으로 글짓기를 즐기고 글씨도 아담한 문인풍을 구사한다. 심산상을 수여한 뒤에 한시를 손수 써서 그 수상자를 기린다. 그러면서 “내 세대까지만 이렇게 하지”라고 말한다. 무언가 조금 걸렸는가? 이는 그가 전통의 선비임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 딸깍발이 선비는 권세에 초연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 현대 선비의 풍모를 그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고양만록』(2004) 중에서


목차


제1권 한국의 역사상 - 이우성 史論集 (1982)
제2권 한국중세사회연구 (1991)
제3권 한국고전의 발견 (1995)
제4권 실시학사산고 (1995)
제5권 벽사관문존(上) ― 詩 (2005)
제6권 벽사관문존(下) ― 散文 (2005)
제7권 신라사산비명 校譯 (1995)
제8권 고양만록 ― 한국학의 저변 (2005)

교환 및 환불안내

도서교환 및 환불
  • ㆍ배송기간은 평일 기준 1~3일 정도 소요됩니다.(스프링 분철은 1일 정도 시간이 더 소요됩니다.)
  • ㆍ상품불량 및 오배송등의 이유로 반품하실 경우, 반품배송비는 무료입니다.
  • ㆍ고객님의 변심에 의한 반품,환불,교환시 택배비는 본인 부담입니다.
  • ㆍ상담원과의 상담없이 교환 및 반품으로 반송된 물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 ㆍ이미 발송된 상품의 취소 및 반품, 교환요청시 배송비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 ㆍ반품신청시 반송된 상품의 수령후 환불처리됩니다.(카드사 사정에 따라 카드취소는 시일이 3~5일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 ㆍ주문하신 상품의 반품,교환은 상품수령일로 부터 7일이내에 신청하실 수 있습니다.
  • ㆍ상품이 훼손된 경우 반품 및 교환,환불이 불가능합니다.
  • ㆍ반품/교환시 고객님 귀책사유로 인해 수거가 지연될 경우에는 반품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 ㆍ스프링제본 상품은 교환 및 환불이 불가능 합니다.
  • ㆍ군부대(사서함) 및 해외배송은 불가능합니다.
  • ㆍ오후 3시 이후 상담원과 통화되지 않은 취소건에 대해서는 고객 반품비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반품안내
  • 마이페이지 > 나의상담 > 1 : 1 문의하기 게시판 또는 고객센터 1800-7327
교환/반품주소
  • 경기도 파주시 문발로 211 1층 / (주)북채널 / 전화 : 1800-7327
  • 택배안내 : CJ대한통운(1588-1255)
  • 고객님 변심으로 인한 교환 또는 반품시 왕복 배송비 5,000원을 부담하셔야 하며, 제품 불량 또는 오 배송시에는 전액을 당사에서부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