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가 망가뜨린 두 형제의 삶, 그 자리에서 발견한 희망을 이야기하다
‘마음이 자라는 나무’ 마흔 번째 책 《12월 31일의 기억》이 출간되었다. 일본아동문예가협회상과 우쓰노미야어린이상을 수상한 일본 작가 이토 미쿠의 성장 소설이며, 버스 전복 사고로 형 사쿠가 시력을 잃으면서 관계가 어긋나 버린 형제의 블라인드 마라톤 도전기를 그렸다. 서로의 진심을 숨기고 함께 달리는 형제의 아슬아슬한 속마음을 작가 특유의 담백함으로 풀어낸 점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제58회 노마아동문예상을 받으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사고로 비롯된 아픔, 고독, 원망의 어두운 감정 속에서도 필사적으로 치유와 연대, 희망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의지가 아름답게 빛난다.
이야기는 전복 사고로부터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시작된다. 열일곱 살인 아키는 촉망받는 육상 선수였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버스 사고로 시력을 잃은 형 사쿠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로 가득했던 시간이 지나고, 아키는 1년 만에 집에 돌아온 형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도 괴롭다. 사쿠가 하얀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것도,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는 것도 모두 자신의 탓인 것만 같다.
그런 사쿠가 어느 날 아키에게 부탁한다. “내 가이드 러너가 되어 줘.” 형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포기했던 달리기. 아키는 더 이상 달리지 않겠다며 거세게 저항한다.
다시는 달리지 않겠다고, 육상과는 연을 끊겠다고, 그때 굳게 결심했다. 자신도 소중한 것을 포기했지만 형에 비할 순 없었다. 고작 육상을 그만둔 것만으로 잘못을 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더 이상 달리지 않기로 마음먹었을 때 아주 조금 편안해졌다. -본문 중에서
한편, 사쿠는 동생이 육상을 그만뒀다는 이야기를 듣고, 아키에게 자신의 가이드 러너가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어떤 마음으로 아키를 뛰게 하는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채, ‘사카노 아저씨’의 소개로 훈련 모임에 들어간다. 그렇게 사쿠와 아키는 서로의 속마음을 감추고 함께 달리기 시작한다. 고작 50센티미터 끈으로 연결된 러너와 가이드 러너는 같은 속도로, 같은 바람을 느끼며 달려야 한다. 하지만 둘은 자꾸만 발 박자가 어긋나기만 한다.
진심을 외면한 채 가볍게 연습하던 사쿠와 아키의 달리기는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 참가하는 대회 출전을 계기로 자못 진지하게 변한다. 마라톤 대회를 준비하며, 사쿠는 점점 마음이 불편해진다. 나는 어떤 결승선을 향해 달리고 있나? “형은 위선자야.”라고 외쳤던 아키의 말이 처음에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사쿠의 가슴을 콕콕 찌른다. 여러 계절을 함께 느끼며 땀 흘려 달린 시간 속에서 형제는 표면상으로는 한층 가까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출발선 앞에 선다. 사쿠와 아키는 과거로부터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달릴 수 있을까?
상처를 극복하고 다시 시작할 용기에 관하여
작가가 상처를 이야기하는 방식은 매우 섬세하다. 상처를 외면하면 절대 치유할 수 없다고, 그래서 상처를 용기 있게 마주해야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고가 지나간 자리에는 서로 다른 아픔을 싸매고 살아가는 가족이 남는다. 자신을 닮은 첫째 아들이 시력을 잃자 둘째 아들을 원망하는 엄마, 아들의 사고를 애써 부정하려는 아빠,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건 동생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이라 믿으려 노력하는 사쿠, 죄책감으로 자신의 꿈을 포기하는 것으로 속죄하려는 아키…….
사쿠와 아키가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게 되는 계기는 ‘함께 달리는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만 달려도 숨이 차던 사쿠가 아키와 달리기 시작하자, 눈이 보이던 때는 오히려 알지 못했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경험을 한다.
보고 싶어. 나는 세상에 있는 모든 걸 보고 싶어. 할 수 없었던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것도, 몰랐던 걸 알게 되는 것도, 모르는 세계를 깨닫게 되는 것도 내게는 모두 보는 거야. 본다는 건……, 눈에 비치는 것만 의미하는 게 아니거든. 나에게 달린다는 건 그런 거야. 아키, 넌 나에게 많은 걸 보여 주고 있어.
-본문 중에서
딱히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지만 서로 연대하며 지금 이 순간을 살아 내는 것. 혼자였을 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을 상대를 통해 새롭게 보게 되는 일. 열일곱 소년과 스무 살 청년에게는 이러한 발걸음이 성장을 의미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어두움 속에서도 반짝반짝 빛나는 희망을 발견하는 이들에게 보내는 응원의 메시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