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야, 밖에 첫눈 오는데 안 나올 거야?”
골목길에도 담장 위에도 작은 마당에도 고루고루 내리는
흰 눈처럼 포근한 두 편의 이야기
오목한 땅에도 볼록한 땅에도 고루고루 내리는 눈처럼 포근한 동화
어린이들의 마음 가운데 홍시처럼 무르고, 고구마 말랭이처럼 자그맣고, 하얀 털옷처럼 예민하고, 둥글게 뭉쳐 놓은 양말처럼 쿰쿰한 마음 들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깊숙한 구석에 숨겨져 발견되기를 기다릴 뿐이다. 『첫눈 오는 날 찾아온 손님』은 누구나 가진 그 마음들을 정확하게 찾아내고 부드럽게 보듬어 주는 작가, 김리리의 새 동화다. 홍시와 할머니에게 찾아온 반가운 손님 이야기를 담은 동명의 단편과, 송이가 좋아하는 양말들만 감쪽같이 자꾸 사라지는 이유에 대한 이야기 「내 친구 털뭉치」, 두 편이 담겼다. 김소라 화가의 맑고 따스한 그림이 차가운 겨울날의 골목과,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풀밭에서의 하루들을 특별하게 그려낸다.
두근두근, 오늘은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데요!
_「첫눈 오는 날 찾아온 손님」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뱅글뱅글 돌아 봐도 심심하기만 한 어느 아침, 할머니가 홍시를 부른다. “밖에 첫눈 오는데 안 나올 거야?” 첫눈이 온다는데 아무리 뾰로통한 홍시라도 이불 고치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현관을 열어 보니 작은 마당에 눈이 하얗게 쌓였다. 게다가 할머니는 오늘 반가운 손님이 올 것 같단다.
“여기가 김복자 할머니 댁 맞지?” 옥상에서 골목 끝을 바라보던 홍시 앞에 나타난 손님은 하얀 털옷에 하얀 털모자를 썼다. “어젯밤에 꿈에 보이더니, 이렇게 찾아와 줬구나. 고맙다.” 눈송이처럼 하얀 얼굴에 동그랗고 큰 눈이 반짝거리는 아가씨를 할머니는 반가이 맞이한다.
홍시는 의젓하게 손님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가벼운 대화를 나눈다. 궁금한 것이 생겼을 때는 조심하는 태도로 묻고, 홍시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해 준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집을 나서려는 아가씨를 따라 나선다. 개구쟁이 동생들이 있다는 말에 꼭 같이 놀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가씨의 손을 꼭 잡고 걸어서 도착한 곳은 깊고 깊은 산속 작은 오두막! 이번에는 아가씨의 귀한 손님이 된 홍시에게 어떤 시간이 펼쳐질까?
송이가 좋아하는 줄무늬 양말이 또 사라졌어요. 그것도 한 짝만!
_「내 친구 털뭉치」
삭 사사삭……. 송이가 침대에 누워 잠들려는 순간 어디선가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분명히 옷장 속에서 들려오는 것 같다. 송이가 전등 스위치를 켜고 옷장 문을 열어젖히는 순간 후다닥 양말 바구니 뒤로 뭔가가 숨는다. “너였구나? 네가 그동안 내 양말을 훔쳐 간 양말 도둑이지?” 보푸라기를 모아서 둥글게 뭉쳐 놓은 듯한 털뭉치는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작은 눈을 뜨고는 말한다. “아, 들켰네.”
그동안 배가 많이 고팠다는 털뭉치는 앞으로 자신을 보살펴 달라고 요구한다. 양말을 훔쳐 가던 것도 모자라 보살펴 달라니, 송이는 얄밉고 황당했지만 바구니 위에 아기 때 쓰던 손수건을 깔아 털뭉치의 침대를 만들어 준다. 겁이 많은 털뭉치를 위해 옷장 문을 조금 열어 두고 침대에 누운 송이는 아주 오랜만에 편하고 깊은 잠을 잤다.
털뭉치는 정말 양말을 훔쳐 가는 괴물일 뿐이었을까? 털뭉치는 왜 송이네 집에 찾아왔을까? 너무 바빠서 가족들과의 약속을 잊곤 하는 아빠와, 너무 지쳐서 자기 자신을 돌보기에도 버거운 엄마가 부딪칠 때마다 어두운 방에서 혼자 잠들던 송이는 오늘 털뭉치와 산책을 나가야겠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의 마음을 그대로 바라보고 안아주는 작가 김리리의 온기
자고 일어나니 갑자기 아이가 되어 버린 엄마를 키워야 하는 덕봉이(『사임 씨와 덕봉이』), 말귀를 못 알아들어 놀림만 받다가 생쥐의 도움으로 이야기꾼이 된 순덕이(『뻥이오, 뻥』), 변비로 고생하다 화장실에서 버릇없는 두꺼비를 만나고 만 아이 준영이(『화장실에 사는 두꺼비』)를 비롯해 ‘떡집 시리즈’ 속 개성 강한 인물들인 만복이, 장군이, 양순이까지, 김리리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독자의 마음에 유독 생생한 인상으로 남는다. 우리 문화의 전통적인 소재에서 비롯된 기발한 상상을 아이들의 다양한 현실과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재미는 김리리 작가 고유의 색깔이다. 그의 동화들이 수많은 어린이 독자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천진하면서도 외롭고, 발랄하면서도 속 깊은 이 아이들이 아마도 모두 작가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부터 왔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그동안 까무잡잡하고 빼빼 말랐던, 공부를 못해서 속상했던, 친해지고 싶은 친구에게 다가가는 법을 몰라 상처를 주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종종 이야기해 왔다. 언제나 아이들의 고민을 궁금해하고, 진실한 위안을 주고 싶다고 밝혀 온 작가의 마음이 『첫눈 오는 날 찾아온 손님』을 통해 불러낸 이름은 홍시와 송이다. 읽는 이들에게 산딸기 눈송이 빙수만큼 시원한 행복의 맛과, 분홍색 수면 양말처럼 보드라운 온기를 전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