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지금 그리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
나의 얼굴을, 그대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
2011년 ‘당당하게 도전하는 희망 그리기 프로젝트’로 기획한 오은정 작가의 ‘지금 시작하는 시리즈’. 『지금 시작하는 드로잉』 『지금 시작하는 여행 스케치』 『지금 시작하는 동물 드로잉』에 이은 마지막 이야기는 자화상 그리기이다. 대상의 얼굴을 그리는 일은 그 시간 동안 대상을 생각하는 일과 같다. “자화상을 그린다는 건 거울을 보는 것과 달라 그리고 싶은 의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탐구하게 된다.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기 때문이다.” 눈동자부터 코 끝, 입가 미소, 얼굴의 음영, 머리칼까지, 그림은 사진에서 전달되지 않는 무엇인가 다른 감각을 전달한다. 그만큼 대상을 세세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관찰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기술적으로 잘 그린 결과물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나를 드러내고 들여다보며 과거, 현재, 미래의 내 모습을 그리기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진실된 시선과 감정을 찾아가는 여정, 그 여행길 끝에 다다르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스스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자화상 그리기를 통해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해보자.
off-jung과 on-jung 두 가지 정체성으로 활동해온 오은정에게 인물화는 기법이 아니라 인생이었다. 색칠 공부 책을 따라 그리던 꼬마 화가에서 미대생이 되는 사이, 그리고 지금에 오기까지 해를 넘길수록 저자가 인물화에 만족감을 느끼는 데 저자의 삶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 저자의 오랜 경험을 나누기 위해 드로잉 에세이라는 새로운 형식에 공을 들였다. 이번 책에는 시리즈의 전작과 달리 명화를 많이 포함했다. 저자가 들려주는 명화와 작가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그들의 작품이 왜 몇백 년 동안 회자되는지 알 수 있다. 삽입된 도판을 살펴보며 마음에 드는 명화 속 인물을 자유롭게 모사해보는 것도 좋다. 더불어 인체의 뼈와 근육 형태를 세밀하게 묘사한 페이지를 추가했다. 트레싱지를 대고 따라 그리거나 더 크게 연습해보기를 추천한다. 재료와 기법으로 구현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인물화에 있다. 그렇기에 인물화는 단순하지 않다. 저자는 여전히 인물화를 완성하는 과정에 서 있다.
이 책은 다섯 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구성했다. 페이지를 넘기는 동안 마주치게 될 수많은 이들의 표정을 담은 저자의 그림, 그림에 곁들인 설명, 고전 작가의 명화, 인체해부학 자료, 저자가 진행한 인물화 연습 프로젝트 수강생의 소감이 인물화를 그리기에 앞서 막막한 독자에게 좋은 단서가 되길 바란다.
「PART 1 시작, 자화상」에서는 자화상이 어떤 의미인지, 자화상을 그리는 사이 자신에게 어떻게 접근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식물에 필요한 물과 햇볕처럼 저자에게는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볼 줄 아는 ‘거울’이 있다. 거울을 통해 적당히 조절한 빛을 따라가면 차마 외면했던 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내 안의 연약함을 똑바로 마주하고 나의 진짜 얼굴을 발견한다. 「PART 2 내가 남을 볼 때」에서는 저자가 9년간 진행한 드로잉 수업에서 만난 이들을 소개한다. 과감한 도전을 결심한 60대 여성, 비로소 나를 돌아본 40대 직장인, 용기 있던 커트 머리 그녀, 건실한 20대 청년, 15년 경력의 베테랑 연극 배우. 처음에는 누구나 어색하고 서툴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당당하게 자신을 보여주었다. 때로 타인의 자화상에서 나를 찾는 단서를 얻는다. 「PART 3 내가 나를 볼 때」에서는 스스로를 탐구한 자화상을 공개한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자신의 얼굴을 그리며 수많은 감정을 보듬었던 기억은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된 저자의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와 진솔한 대화를 나누다 보면 ’나’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내가 닮은 부모님과 나다움을 끌어내는 반려자를 비롯해 나를 둘러싼 관계로 확장된다. 그렇게 또 하나의 자화상이 늘어난다. 「PART 4 다시, 자화상」에서는 내일의 자화상을 다룬다. 나는 나지만, 언제든 다른 삶을 살 수 있기에 내일은 오늘과 다른 자화상을 그릴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삶은 연극 무대 같기도 하고 소설책 같기도 하다. 당신 안에는 몇 개의 자아가 있는가? 그 모습 전부가 ‘나’라는 걸 알면 한결 자유로워지리라. 작은 삽지 속 오은정 작가의 여러 자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PART 5 본격 인물화 그리기」에서는 본격적인 실기를 위한 다양한 기법을 알려준다. 고전 명화 탐구법, 뼈와 근육 구조를 익히는 해부학, 부드러운 피부 표현, 감정을 넣고 음영을 더하는 연출, 체형과 동작에 이르기까지. 이를 능숙하게 활용하려면 대상을 많이 관찰하고 깊이 알아야 한다. 그만큼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 시작점에 순수한 눈이 있다. 바라보는 것부터 시작하자.